‘정글’과 문학적 저널리즘, 그리고 사실과 주장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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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과제로 쓴 글.)

기자들이 가장 상처 받는 댓글 가운데 하나가 “기자야, 그건 니 생각이지”다. 현명한 독자들은 기자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다. 기사는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말의 사실과 사실에 대한 판단을 다루는 것이고 진실의 한 부분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진실을 섣불리 규정하거나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다만 편견을 깨고 더 큰 그림을 보고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기자들은 수습 기자 시절부터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기자는 객관적인 관찰자고 사실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는 게 고전적인 저널리즘 이론이다.

“기사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라(Stay out of the story)”는 오래된 격언도 같은 의미다. 이나연 성신여대 교수는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언론을 지탱해주는 사실 검증의 가능성은 물론 언론의 기능도 무너진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실은 어디에나 넘쳐나고 사실을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인 척 하면서 사실과 주장을 뒤섞는 기사도 문제지만 애초에 주관을 배제한 날 것의 사실 전달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선택된 편집은 어떤 면에서 오보보다도 더 나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오보는 실수일 수 있지만 선택적 편집은 편집 방향에 맞추기 위해 사실을 비틀거나 누락하거나 과장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욘드 뉴스 : 지혜의 저널리즘’의 저자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교수는 “전통적인 육하원칙 보다 ‘왜’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되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어디에나 널려 있는 단순 발생 사건보다 맥락과 통찰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업튼 싱클레어가 1906년에 쓴 ‘정글’은 논쟁적인 작품이다. 소설의 형식을 띄었지만 그 어느 저널리즘 콘텐츠 못지 않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이후로 미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싱클레어는 7주 동안 시카고의 돼지 도축장에 잠입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취재해서 소설로 쓴다. 스스로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구분이 의미가 없다. 병든 소를 도축하는 것은 기본이고 빗물이 새고 쥐가 우글거리는 도축장, 소똥과 먼지, 톱밥을 범벅으로 갈아 만든 소고기 통조림, 핏물이 가득 고인 바닥에 고깃덩이가 뒹굴고 침을 뱉고 심지어 실수로 탱크에 뛰어든 일꾼까지 함께 갈려 나갔다는 대목은 아연실색할 정도다. 주인공인 이주 노동자 유르기스는 “내가 돼지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탄식하지만 독자들은 유르기스의 삶이 돼지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시지용으로 어떤 고기가 사용되는가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합격품과 오래 되어 허옇게 곰팡이가 슨 소시지가 유럽에서부터 모두 되돌려져 왔는데, 거기에 붕사나 글리세린을 섞어 넣은 후 다른 소시지와 함께 다시 국내 시장으로 내보냈다.”

“말이 창고지 늘 지붕이 새어 빗물이 떨어지고 쥐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그런 곳이었다.… 손으로 고기더미를 휙 쓸어 보면 마른 쥐똥이 한 줌씩 묻어 나왔다. 쥐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쥐약을 놓곤 했는데 죽은 쥐와 쥐약 묻은 빵이 고기와 함께 깔때기 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싱클레어는 이 소설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폭로하기 위해서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이 기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고 큰 반향을 미치자 싱클레어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보여서가 아니라 결핵에 걸린 소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서” 이 책이 잘 팔렸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대중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실수로 위장을 가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소설 덕분에 미국에서는 한동안 소시지 판매가 급감했고 채식주의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식품의약품법이 제정됐고 연방식품의약국(FDA)이 설립된 것도 이 소설의 여파다.

이 소설은 탐사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평가와 문학적(literary)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 문학적 저널리즘은커녕 저널리즘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등의 여러 상반된 평가가 엇갈린다. Wout Vergauwen(2013)는 이 소설을 “기껏해야 현실에 근거한 허구일 뿐”이라면서 “논픽션 소설로 보는 게 적당하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이 책이 “사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면서 “정치적 팜플렛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나는 그를 완전히 경멸한다”면서 “그는 히스테리적이고, 균형이 맞지 않으며, 그가 말한 것 중 4분의 3은 절대 거짓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조사관을 파견해 현장을 실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사람을 갈아넣었다는 것 빼고는 대부분 사실에 부합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실제로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의혹이다. 루즈벨튼는 이 보고서의 전문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설이 저널리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소설을 표방했고 사실을 기초로 허구를 더한 것이라면, 그리고 독자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고 혼동하지 않는다면 효율적인 스토리텔링의 실험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현석 중앙대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꿈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사이 통제되지 않은 자본의 욕망은 왕성하게 번식했다”고 평가했다.

원래 이 소설은 1979년 시인 채광석씨의 번역으로 한국에 출판됐으나 판매 금지 도서로 분류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9년에 다시 출간됐다가 절판된 상태다. 1979년 번역본에는 주인공인 유르기스가 사회주의자로 거듭나는 마지막 부분인 29~31장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고 한다. 과장된 사족이거나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일부러 뺐다는 번역자의 설명이 있었지만 정치적 팜플렛이라는 비난을 의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것은 봉준호 감독의 넷플릭스 필름 ‘옥자’처럼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역시 사실에 근거한 과장과 허구로서 사실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글’은 굳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근거로 강력하게 의견을 밀고 나가고 주장과 신념을 끌어낸다. 허구라는 걸 전제하는 동시에 주장이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선택된 편집을 극복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논리와 맥락을 제공하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문학적 저널리즘 역시 저널리즘의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하되, 접근 가능한 최선의 진실에 다가 가려는 노력, 그리고 공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