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빈 니레지하치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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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올드퍼스트교회 앞에 나붙은 포스터.

“리스트의 부활! 세기의 피아니스트 어빈 니레지하치, 40년만에 무대에 서다!”

세기의 피아니스트라니. 어빈 니레지하치(Ervin Nyiregyhazi)라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데 40년 만에 무대에 선다고? 도대체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정확한 발음은 NEAR-edge-hah-zee에 가깝다고 한다.)

호기심으로 그 자리를 찾았던 음악 평론가 테리 맥네일은 넋을 잃고 있다가 연주회가 끝날 무렵에야 가방 안에 녹음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마지막 몇 곡이 겨우 카세트 테이프에 담겼다. 테리 맥네일은 그 녹음을 몇몇 사람에게 들려주었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뉴욕타임스의 음악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20세기까지 살아남은 진정한 19세기 피아니스트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 기적적인 연주를 녹음을 통해서나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소리쳤다.

1903년 1월19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니레지하치는 두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고 네 살 때는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18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고 1920년 뉴욕에서 데뷔 무대를 열었을 때는 온갖 평론가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한 심리학자가 니레지하치를 몇 차례 면담하고 ‘음악 신동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냈을 정도였다.

모짜르트와 리스트의 천재성을 타고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음악 신동에게 세상살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돈을 긁어 모으는 데 재미를 붙인 어머니의 욕심을 채우느라 여기저기 연주회에 팔려다녀야 했고 어머니에게 벗어나려고 11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을 했지만 역시 그는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친구도 행운도 따르지 않았다. 음악 신동의 명성이 무색하게 싸구려처럼 팔려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싸구려로 취급했다. 지하철에서 노숙하면서 연주 여행을 다녔다고도 하고 나중에는 식당이나 서커스단까지 아무렇게나 팔려다녔던 모양이다. 그럴수록 그는 바하나 모짜르트, 베토벤을 버려두고 고집스럽게 리스트에만 매달렸다. 돈 되는 음악을 하라는 어머니의 성화도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니레지하치는 완전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부두에서 짐을 나르기도 하고 뒷골목의 부랑자로 떠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미 아무도 어빈 니레지하치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40년 만에 나타난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백발의 노인이 돼 있었다.

그는 아내의 병원비가 필요했다. 갈 데 없이 떠돌면서 바닥 없이 무너져 내리던 젊은 시절, 그의 옆에서 그를 지켜준 사람은 엘시 스완 밖에 없었다. 엘시 스완은 니레지하치 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꺾여버린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고 그에게 새로운 열정을 불어 넣어주었던 엘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청혼을 했다. 그게 엘시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40년 만에 일흔 살의 노구를 끌고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다.

드라마 같은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니레지하치는 40년 동안 피아노는커녕 피아노를 들여놓을 제대로 된 집도 없이 떠돌았던 것 같다. 엘시 스완은 40년만의 콘서트가 무색하게 곧 세상을 떠났고 테리 맥네일이 녹음한 테이프는 여기저기 떠돌다가 한 평론가의 손에 들어가 3년 뒤 마이너 레이블에서 ‘두 개의 전설’이라는 이름의 음반으로 출시된다. 음질은 형편없지만 전설로 남은 그의 연주를 엿볼 수 있다.

니레지하치의 재능과 드라마에 매료된 평론가들이 수소문해서 숨어지내던 니레지하치를 찾아냈고 정식으로 몇 차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말년 역시 그리 안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리스트의 부활이라는 극찬과 우스꽝스럽고 아마추어적이라는 혹평이 엇갈렸고 실제로 쾅쾅 내려치는 듯한 독특한 주법은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연주를 선보였다. 1978년에는 카네기홀 공연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다. 1980년과 1982년에는 일본으로 연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여든네 살이 되던 1987년 결장암으로 사망한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평생 결혼을 열 번이나 했고 알콜 중독에 섹스 중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장례식은 10번째 부인 도리스가 지켰다는데 그럼 엘시가 죽고 또 결혼을 한 건가?) 2000곡 이상 작곡을 했지만 공개된 건 거의 없다. 음악에 미련이 없지는 않았던 듯 수백 개의 녹음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죽고 난 뒤 그를 후원했던 일본의 타카사키아트센터에 기증했다. 이 센터가 파산하면서 채권자들에게 압류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는데 다행히 테이프의 보존 상태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2017년에 와서야 이 릴 테이프를 사들인 일본의 음반 회사가 니레지하치의 1972년 캘리포니아 센추리클럽 라이브 공연을 앨범으로 제작했다. 그러니까 1973년 샌프란시스코 공연 보다 더 이른 공연이었다.

Nyiregyházi Live
Vol 1: The Century Club of California, 1972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열 번째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40년 만의 콘서트 이후 어느 정도 유명세를 누렸고 마니아도 많았던 것 같다. 니레지하치의 음반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1972년의 이 실황 녹음은 올해 3월 킥스타터에서 공동 제작 프로젝트로 제작됐다. 소네토클래식의 CEO 토모유키 사와도는 니레지하치의 미공개 테이프를 사들이려고 오랫 동안 타카사키아트센터와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비운의 음악 신동, 그래도 누군가가 그를 기억하고 수십년 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던 그의 음악을 되살려 디지털로 복원하는 멋진 프로젝트를 만들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음반으로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뉴욕타임스의 오비추어리.

세계 최대 규모 니레지하치 아카이브라는 푸가닷어스. http://www.fugue.us/Nyiregyhazi_top_E.html

니레지하치의 전기.

니레지하치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리스트도 좋지만 라흐마니노프도 매력적인 듯.)

킥스타터 펀딩.

leejeonghwan.com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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