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6, 2003

저녁 늦게 씻고 들어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다가 깜짝 놀랐다. 혼자 음악을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누군가 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가 설마 누가 있을까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는데 역시 아무도 없다.

글렌 굴드였다. 글렌 굴드는 피아노를 치면서 끊임 없이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다.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따라라라”라거나 “딥딥딥”, ” 투루루루”, 음악이 빨라지면 “빰빠라빰빰”이라거나 “우르르르르”, 그 밖에 알아 들을 수 없는 낮은 속삭임. 오디오 시스템이 왠만큼 좋지 않거나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꽤나 오랫동안 글렌 굴드를 들어왔지만 처음이다. 싸구려 스피커를 새로 들인 덕분이지만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오늘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간단히 소개하는데서 그칠까 한다. 언젠가 글렌 굴드 이야기를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거쳐 다시 아리아로 끝난다. 같은 주제에서 출발했지만 모두 새롭고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가 있다. 듣고 있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다.

1. 1955년 6월, 녹음 기술자의 증언. “6월이라고는 하지만 찌는듯한 날씨였는데 굴드는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식수로 사용할 두개의 물병과 그 유명한 굴드의 의자까지 들고 왔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굴드의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져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흥얼거림을 녹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 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 이미 악보를 읽고 다섯살 때는 직접 작곡을 하고 연주까지 했다.

3. 캐나다의 소설가 로버트 풀포드의 증언. “어린아이인데도 굴드는 고독했다. 그는 미친듯이 연습했다.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가 잘 알고 있었다.”

4. 굴드는 10살 때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 입학해 정식으로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한 뒤 15살 때 첫 연주회를 열었다.

5. 굴드의 스승 게레로의 증언. “새로운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워낙 개성이 강하고 천재적인 아이라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당황할 때가 많다.”

6. 굴드의 증언. “게레로와 나의 스타일은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음악을 가슴으로 느꼈지만 나는 머리로 이해했다.”

7. 스물두살, 1955년 6월 굴드는 첫 음반을 녹음한다.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었다.

8. 굴드는 황홀한 표정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도 갑자기 온통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크게 벌리기도 하고, 몸을 계속 흔들어 대면서 끙끙거리는 소리로 계속 곡을 흥얼거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연주 모습을 보여줬다. 중얼중얼 속삭이기도 하고 한손만으로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지휘를 하는 듯이 손을 높이 쳐들고 흔들기도 했다.

9. 그가 흥얼거리는 소리는 녹음 기술자들에게는 골치거리였지만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굴드의 끙끙거리는 콧소리와 삐걱대는 의자 소리는 오디오 시스템의 상태를 판별하는 기준으로까지 활용되기도 했다.

10. 스물네살, 1957년에 굴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연주한다. 1960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때만해도 낯설었던 TV에 출연한다.

11. “여러분, 음악이 너무 늘어진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굴드가 바라는 템포에 맞추다 보니 그렇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 1960년 카네기홀 연주회에서.

12. 굴드와 번스타인은 루드비히 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협연하면서 템포 문제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힘차고 역동적인 연주를 좋아하는 번스타인이 마냥 느려터진 굴드의 연주에 맞추기로 했다. 번스타인은 불만에 가득차 있었지만 청중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13. 굴드의 연주 여행은 가는 곳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소련에서는 그의 음반을 구하느라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다. 곳곳에서 그의 음악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14. 그러나 굴드는 청중을 싫어했다.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5. “콘서트를 할 때면 나는 희극배우처럼 느껴진다.” “콘서트는 고통으로 가득찬 속임수일뿐이다.”

16. “나는 수많은 꾀병을 생각해두고 있어요. 콘서트를 취소할 핑계로 써먹을 생각입니다.” 번스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17. 굴드는 식성도 까다로웠다.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고 거의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끼니를 떼웠다.

18. 음악의 취향도 분명했다. 굴드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다. 브람스도 녹음을 몇일 앞두고 못내키는 듯 성의없는 연습을 조금했을 뿐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시들했다. 실제로 연주도 별볼일 없었다. 가끔 쇤베르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굴드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열심히 연주했던 음악은 바하뿐이었다. “모짜르트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는 세간의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그는 너무 늦게 세상을 떠났다.”

19. 굴드는 서른두살, 1964년 4월 10일 LA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그때부터 그는 녹음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 뒤로 그는 죽을 때까지 결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20. 굴드는 같은 음악을 여러차례 되풀이해서 녹음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굴드는 짜집기를 전혀 거북해하지 않았다. 굴드는 연주회의 청중을 떠나 녹음실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수많은 음반을 만들어냈다. “테크놀로지야말로 나와 음악과 바깥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다.”

21. 토론토 대학 철학과 교수 제프리 페이전트는 글렌 굴드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굴드의 모든 레코딩은 그의 에세이, 필름, 작곡, 기고문, 다큐멘터리가 모두 그러하듯이 다양한 차원의 미학을 공유하기 위한 굴드 자신의 예언자적 노력의 결실이다. 굴드야말로 철학자와 시인, 그리고 음악가를 한몸에 지녔다는 옛 전설의 재현인 것이다.” 굴드는 이 평전에 대한 서평을 썼다. “페이전트 교수가 이 책에서 쓰고자 했던 것은 한 피아니스트의 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때때로 건반을 통하여 이야기되는 일련의 음악적 사고일 것이다.”

22. 굴드의 연주는 가끔 지나치게 빠르거나 어이없을만큼 느리다. 다른 연주자들이 4분 남짓한 동안 연주하는 음악을 10분이 넘도록 늘여 연주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남들의 절반밖에 안되는 시간에 연주를 마치기도 한다. 굴드는 늘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23.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1964년 토론토 왕립 음악원 강연에서.

23.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 가운데.

24. 굴드는 에어컨이 켜진 식당은 결코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잘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전화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는 꽤나 심각했다. 연주를 하기 전에는 뜨거운 물을 세수대야에 붓고 20분 가까이 손을 담그고 있었다.

25. 나중에는 악수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손을 내밀면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26. 피아노를 고치러 온 스타인웨이의 조율사가 등을 가볍게 툭 쳤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도 했다. 굴드는 왼팔과 등에 통증이 있고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며 스타인웨이를 상대로 30만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7. 굴드는 스타인웨이에서 나온 CD318 피아노를 썼다.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피아노 연주라고 보기 어려울만큼, 마치 쳄발로 연주처럼 가볍고 맑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하의 건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굴드의 연주는 충격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8.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때만 해도 지루하고 변화없는 음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음악을 연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굴드가 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됐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이제 가장 바하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 꼽힌다.

29. 굴드는 1981년 한번 녹음한 음악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 전에 녹음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한다. 새로운 해석을 새로운 기술로 담아낸 굴드 최고의 음반이었다. 굴드는 수많은 음반을 남겼지만 시작과 끝은 모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30.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세번 녹음했다. 첫번째는 1955년 굴드의 첫번째 녹음. 굴드는 반복되는 부분을 과감하게 빼고 남들이 한시간 가까이 연주하는 음악을 33분만에 끝냈다. 두번째는 1958년 잘쯔부르그 페스티발에서 연주한 실황 녹음. 두번째는 첫번째와 거의 같다. 세번째는 1981년 굴드의 마지막 녹음. 모두 51분, 첫번째 녹음보다 무려 두배 가까이 길다.

31. 굴드는 마지막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다음해 1982년, 50세 되던 해 10월 4일 심장발작으로 죽는다.

32.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가운데.

참고 : 글렌 굴드의 홈페이지.

글렌 굴드는 많은 글을 썼다. 홈페이지에 가면 ‘글렌 굴드가 본 글렌 굴드’라는 재미있는 인터뷰 기사도 있다. 시간이 나면 옮겨볼 생각이다.

(월간 ‘객석’과 굴드 홈페이지, 구글 검색 등을 참고해서 쓴 글입니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오늘 아침 주주총회를 끝으로 미디어오늘에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ChatGPT와 저널리즘의 책임”을 주제로 특강이 있는데 이게 제가 미디어오늘 대표로 나서는 마지막 대외 행사가 되겠네요. 끝나고 선배들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요. 1. 4월부터 슬로우뉴스 대표를 맡기로 했습니다. 유한회사 슬로우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제가 100%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뽑고 콘텐츠도...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시간 날 때마다 만들었던 라즈베리파이 오디오. 드디어 완성. 사실 별 거 없는데 여기저기서 부품 조달하고 거기에 맞춰 도면 만드는 게 힘들었습니다. build log는 영어로. This is my new network audio system. All in one Integrated Amplifier. 1. Raspberry Pi 4B. 2. Hifiberry DAC+DSP. 3. 7 inch touch screen for raspberry pi. 4. Chromecast...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에 경력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으로 3년, 사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다행히 월급날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요. 열심히 벌어서 금융 부채를 모두 정리했고 만성적인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언론사 경영이라는 게 날마다 전쟁 같았지만 한 번도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가능한 미디어오늘을 위한 성장 엔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 15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지면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아쉬움이...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