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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토익에 목을 매는가.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6, 2003

다시 돌아봐도 깜짝 놀랄만한 끔찍한 통계가 있다. 2002년 11월 우리은행은 150명의 신입 행원을 채용했다. 응시자는 모두 1만2994명, 무려 86.6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토익 성적이다. 900점 이상이 무려 1200명이고 이 가운데 990점 만점을 받은 사람도 10명이나 된다. 이밖에도 해외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포함한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가 1366명, 국내 공인회계사 자격증 소지자가 151명,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 소지자가 193명에 이르렀다.

다른 자격증이 없다면 토익 900점 밑으로는 그야말로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상황이다. 토익(TOEIC, 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해마다 전 세계를 통털어 160만명 이상이 이 시험을 치른다. 200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110만명이 토익 시험을 봤다. 1999년만해도 36만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3년만에 무려 3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왜 이렇게 다들 토익 시험에 목을 매는 것일까.

2003년 4월 채용정보업체 리크루트가 대학생 127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자. 취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뭐냐는 질문에 응답자 10명 가운데 4명 정도(44%)가 ‘어학실력 부족’을 꼽았다. 다음으로 학벌(19%)과 전공분야(10%), 자격증 부재(9.6%) 등이 꼽혔으며 나이(5%)와 외모(4%) 등을 꼽는 응답자들도 있었다.

영어 공부에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받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62%가 ‘아주 많이 받는다’, 27%는 ‘조금 받는다’고 대답했다. ‘받지 않는다’는 대학생은 4%에 지나지 않았다.

왜 영어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32%가 ‘핵심인재로 성공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대답했고 31%는 ‘글로벌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30%는 ‘채용시 기업에서 중요 항목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가장 정확하고 솔직한 대답은 세번째일 것이다.

기업이나 학생들이나 왜 다들 토익 시험에 목을 매는 것일까. 차마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기업 인사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천통의 입사 원서가 들어왔는데 면접을 보려면 어떻게든 추려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고 소팅을 시켰어요. 학교 등급에 따라 한번 자르고 학교 성적으로 한번 자르고, 토익 성적으로 한번 더 자르고 그래도 너무 많길래 그냥 남은 원서 가운데 홀수번만 가려서 뽑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200명 정도 되더라고요.”

기업 입장에서는 수천명의 입사자들을 가려낼 변별 기준이 마땅치 않다. 수천통의 입사 원서 가운데 그나마 변별력을 갖춘 지표는 토익 점수밖에 없다. 토익 950과 750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영어를 얼마나 잘하고 못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토익 점수는 그 사람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토익 점수를 950 맞을 정도라면 다른 어떤 일을 맡기더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문제는 결국 토익이다. 출신 학교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 학교 성적이야 하루 아침에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 토익 성적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짝 올릴 수 있다. 게다가 학교 성적은 변별력이 별로 없다. 4.5 만점에 3.3이나 3.6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학교 성적은 그야말로 하한 기준일 뿐이다. 성적이 너무 안 좋으면 문제겠지만 많은 기업들에서 어느 정도 이상만 되면 학교 성적은 더이상 크게 눈여겨 보지 않는다. 3.0 이상이면 무난하고, 3.5 정도만 넘으면 성적이 걸림돌은 되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2001년 기준 우리나라 토익 시험 응시자들의 평균 성적은 990점 만점에 558.7점이다. 그러나 558.7점은 참담한 점수다. 2002년 기준으로 대기업 공개채용에서 지원자들의 토익 점수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앞서 살펴봤듯이 우리은행은 2002년 150명 모집에 1만2994명이 몰려들었고 이 가운데 토익 성적 900점 이상이 무려 1200명이나 됐다. 990점 만점을 받은 사람도 10명이나 됐다.

산업은행은 35명을 뽑는데 8850명이 몰려들었고 이 가운데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외국대학 출신 지원자가 100명이 넘었다. 토익 만점을 받은 사람이 11명, 900점 이상을 받은 사람은 2000명을 넘어섰다.

조흥은행도 만만치 않다. 모두 1만1340명 가운데 토익 900점 이상이 1000여명, 해외 MBA(경영학 석사) 78명, CPA(공인회계사) 114명, CFA(미국 재무분석사) 33명, FRM(금융위험관리사) 38명, AICPA(미국 공인회계사) 149명, 감정평가사 4명, 세무사 21명, 국제변호사 1명 등이 몰려들었다. .

신용보증기금은 50명 모집에 1만1810명이 몰려들었다. 토익 900점 이상이 1033명, 대학 평균학점 4.0이상이 1013명이나 됐다.

합격자의 토익 점수를 밝히는 기업이 거의 없지만 토익 점수가 꾸준히 올라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리바트가구는 2002년 서류전형 합격자의 토익 점수 평균을 내본 결과 850점으로 전년보다 100점 이상 올랐다고 밝힌 바 있다.

채용정보업체 휴먼피아가 2003년 5월 구직자 1245명을 대상으로 취업을 위한 적정 토익점수를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800점 이상이라고 답했다. 정적 점수가 얼마냐는 질문에 31%가 ‘800점 이상’을, 16%는 ‘900점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700점 이상’은 19%, ‘600점 이상’은 6%에 지나지 않았다.

취업난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02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대학 졸업생 10명 가운데 4명만 취업에 성공했다. 거꾸로 살펴보면 10명 가운데 6명은 졸업하고 백수로 나앉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온라인 채용정보 업체 잡코리아가 2003년 3월 대학 졸업생 29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6.7%인 1072명만 취업을 했다. 남학생(39.4%)이 여학생(31.9%) 보다 많았고 4년제 대학 졸업생(37.0%)이 2년제 대학 졸업생(34.4%) 보다 많았다.

2002년말 기준으로 20~29세 청년 실업자 수는 모두 27만1000명에 이른다. 전체 실업자 67만6000명의 40%를 넘어선다. 평균 실업률도 전체 실업률(3.0%)의 두배가 넘는 6.4%를 기록했다.

냉정하게 따져 말할 때 토익 성적은 영어 실력과 직결되지 않거나 무관하다. 문제만 보면 답이 탁 튀어나오지만 기껏 토익 900점을 넘고도 직접 외국인을 맞닥뜨릴 때 버벅거리는 사람들이 둘러보면 수두룩하다. 그러나 토익 공부는 이제 우리 시대 사회화의 한 과정이다. 토익 성적은 성실성과 표준화의 척도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디를 가든 상당한 토익 점수를 보여줘야 한다.

대기업이라는 큰 우산 아래 들어가 비를 피하고 싶은가. 혼자서 모든 비를 맞고 험난한 길을 직접 헤쳐나갈 자신이 없다면 토익 점수는 필수다. 4학년 무렵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쫓기면서 공부하기보다는 일찌감치 꾸준히 영어 실력을 기르는 게 좋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험을 여러번 치를수록 성적이 올라간다는데 있다. 처음 시험 본 사람들의 평균 성적은 481점, 두번째 치른 사람들은 533점, 세번째는 563점, 네번 이상 시험을 치른 사람의 평균 성적은 622점으로 꾸준히 올라갔다. 전체 응시자 98만여명 가운데 4회 이상 시험을 치른 사람이 무려 39.1%에 이르렀다. 물론 4번이나 시험을 치르고도 622점 밖에 받지 못한다면 꽤나 심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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