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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건국가’와 ‘작은 정부’, CEO 대통령의 딜레마.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4, 2008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정당에 기꺼이 표를 던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보수 정당이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를 더 잘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다분히 맹목적인 믿음에서 비롯한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박정희 향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보수 세력과 기득권 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주목할 부분은 그 반대편에 있는 유권자들까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데 있다. 이명박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기반인 보수 기득권 계층의 이해를 대변해야 하는 동시에 노무현 정부에 실망해 그를 지지한 저소득 노동자 계층에도 채무의식을 안고 출발했다.

이명박 당선인과 노무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념에서 정치경제적 지형을 공유한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노 대통령이 최소한의 시장 질서를 강조한 반면, 이 당선인은 좀 더 자유방임 쪽에 가깝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당선인은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형태의 성장 정책을 펼칠 전망이다. 그가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한반도 대운하에 목을 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일 한국경제 39면에 실린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의 칼럼은 향후 이명박 당선인과 신자유주의 세력의 갈등을 예고하는 한 징후로 읽힌다. 이 당선인은 박정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시장은 그가 규제를 풀되 시장에 개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당선인의 일련의 ‘우파 포퓰리즘’ 정책은 그를 지지했던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김 원장은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하더라도 휘발유 가격은 업계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장은 권력으로 눌러서 값을 낮출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품질이 떨어지고 투자가 줄어들게 돼 결국 싸구려 비지떡이 돼 버린다”는 이유에서다.

인수위는 유류세 10% 인하를 계획하고 있지만 이 경우 휘발유 가격은 리터 당 80원 정도 낮아지게 된다. 문제는 업계에서 이를 반영하지 않으면 유류세 인하의 혜택이 고스란히 정유회사나 주유소의 몫으로 돌아간다는데 있다. 실제로 1999년 5월, 유류세를 51원 낮췄는데 휘발유 가격은 9원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례도 있다. 그런데도 김 원장은 업계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원장은 또 통신비 인하에 대해서도 “정부의 역할은 통신업체를 둘러싼 제도를 바꾸는 일”이라며 “가격 경쟁을 막고 있는 규제가 문제라면 그것을 없애면 되고 규제가 없어진 이후 구체적으로 요금을 어떻게 할지는 개별 기업들의 결정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업계 1위 SK텔레콤의 주장과 정확히 같다. 시장에 맡겨두고 경쟁을 유도하면 알아서 가격이 내려갈 거라는 논리다.

김 원장은 “잃었던 성장 잠재력을 되찾는 일은 꼭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면서도 “정부가 할 일은 민간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민간이 신바람 나게 뛸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 정부가 할 일”이고 “성장률은 정부가 억지로 만들어 내는 숫자가 아니라 국민 각자가 노력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숫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는 4일 사설에서 인수위에서 검토하고 있는 신용불량자 사면과 관련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보수·경제지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이명박 정부의 시장 개입에 선을 긋고 있다.

부동산 정책 역시 벌써부터 갈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1가구 1주택의 경우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낮추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었지만 당장 집값이 흔들리는 분위기를 보이자 내년 이후로 늦추기도 했다. 과세 기준을 6억 원에서 9억 원으로 올릴 경우 강남권 3개 구의 67.5%인 종부세 대상 아파트 가운데 절반 수준인 37.6%만 종부세 대상으로 남게 된다. 한겨레는 4일 “종부세 기준을 완화하면 결국 부자 동네에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종부세와 재건축 규제 완화 등은 향후 총선 국면에서 핵심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경제는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이미 부과됐으니 다음 부과 때까지 시장 추세를 봐가면서 아주 융통성 있게 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 당선인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보수·경제지들은 일관된 목소리로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명박 당선인은 ‘MB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서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기업의 경영에는 외부가 존재하지만 국정 운영에는 외부가 없다. 재화는 한정돼 있고 결국 소득 재분배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한편, 애초에 이 당선인이 꿈꾸는 ‘토건국가’와 보수·경제지들이 요구하는 ‘작은 정부’는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보수 기득권 계층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겠지만 그는 결국 일정 부분 이들의 기대를 배반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이미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 상태다. 노 대통령처럼 이 당선자 역시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면서도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보수 기득권 계층의 집단 이기주의가 시장 경쟁과 실용으로 포장되고 정부를 압박하는 상황은 이 당선인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당선인이 어느 선까지 타협하고 양보할 것인지, 그가 과연 노 대통령의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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