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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1, 2004

이제는 아무도 감히 흑인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태인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차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자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차별이 옳지 않지만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자로 일할 무렵,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음란하고 난잡한 쇼를 벌이는 플레이보이 클럽에 여 종업원으로 잠입해 취재를 한다. 스타이넘에 따르면 그곳에서 여성은 ‘바니 걸’으로서만 가치가 있고 ‘바니 걸’은 거의 가치가 없었다.

이 잠입 취재는 두고두고 스타이넘을 괴롭혔다. 기사는 정확했지만 결국 남성들의 싸구려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 그쳤고 ‘바니 걸’ 출신이라는 애꿎은 오해와 비아냥이 끊이지 않았다. 스타이넘은 철저하게 객관적이려고 했지만 그 객관적인 시선은 결국 남성들의 시선이었다. 여성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남성들의 설명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모든 여성들이 결국 ‘바니 걸’처럼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커피숍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는 쫓겨났다. 남자 없이 혼자 밖에 돌아다니는 여자는 매춘부 밖에 없다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편견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끊임없이 싸우고 반박하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나가라고 하면 못나가겠다고 맞서야 한다. 나는 매춘부가 아니고, 설령 매춘부더라도 여기서 커피를 못마실 이유가 없으니까.

어느날 스타이넘은 낙태가 죄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낙태는 합법이고 모든 여성은 임신을 피할 권리 못지 않게 임신에서 벗어날 권리도 있다. 스타이넘은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페미니즘에 눈을 뜬다.

그때까지 스타이넘은 남자들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고민했고 실제로 살아남았다. 이제 스타이넘은 어렵게 편입한 남자들의 사회에 소속감이 희미해지는 걸 느낀다. 남자들 사회에서 느꼈던 모멸감과 수치심의 정체가 드러나고 어디선가 환한 빛이 비추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스타이넘은 그때 비로소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여성은 여성에 의해 이야기돼야 한다. 여성들의 생각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1971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 잡지 ‘미즈’를 창간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느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들, 늘 밖에 나가 큰소리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 것들이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씌여 있었다.”

“여성도 사람이다. 여성도 밥하고 설겆이하고 청소하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미즈’의 주장은 언뜻 가볍다. 그래서 여성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와 달리 ‘미즈’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중산층 여성들을 위한 호화스럽고 겉만 번드르한 잡지라는 비판이 있었고 페미니즘의 현안을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좀더 사회 주류에 가까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운동의 내부를 더 자세히 돌아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를 위한 페미니즘 잡지와 페미니즘에 바탕을 둔 여성 잡지의 경계에 ‘미즈’는 있었다. ‘미즈’의 페미니즘은 결국 특정한 페미니즘일 수밖에 없었다. 스타이넘은 그렇게 중립을 지켰고 중산층 여성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많은 여성들의 생각을 바꿨다. 대중성 확보 차원에서 ‘미즈’의 중립은 옳았다. ‘미즈’는 여성문제를 정치 쟁점으로 만들었고 1973년 미국은 낙태법 개정안을 폐지하기에 이른다.

“남성 우위는 체계적인 지배형태다. 그것은 그냥 나쁜 태도가 아니라 물질적인 토대를 갖춘 일련의 제도화된 관계다. 남성은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고 다른 모든 지배계급처럼 자기 이익을 방어할 것이며 따라서 그런 세력에 도전하려면 혁명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 엘런 윌리스, ‘미즈’의 편집자.

스타이넘은 올해 70살인데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는 예쁘지 않은 페미니스트들보다 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래서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질시를 받기도 했다. 언론은 그런 그를 한껏 띄우면서도 철저하게 조롱했다. 스타이넘은 비난에 아랑곳 없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늘 남자들을 갈아치웠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그는 남자를 잘 잡아 성공했다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타이넘의 미모가 ‘미즈’의 성공에 큰 몫을 했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페미니즘 운동은 못생긴 여자들이나 한다는 편견을 스타이넘을 깨뜨렸다. 언론은 스타이넘에 열광했고 스타이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스타이넘은 가장 예쁘고 그래서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였다.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랬다. 스타이넘은 이론가기 보다 행동가였고 어떻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잘 알고 있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이 전기문은 꽤나 지루하다. 소소한 일상을 마냥 늘어놓는 가운데 정작 생각과 사상의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스타이넘과 ‘미즈’의 주장조차도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다. 서술에 힘이 없고 번역까지 어설프다. 혹시라도 사서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책 값도 무려 2만3천원이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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