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기능과 패션의 두 마리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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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나이키의 갈퀴 모양 로고를 단돈 35달러에 만들었다는 사실은 언제 다시 들어도 새롭다. ‘스우시(swoosh)’라고 부르는 이 독특한 로고를 만든 사람은 나이키 창업자의 옆집에 살았던 캐롤라인 데이비슨이라는 대학생이었다. 흔히 기업의 역사가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이키의 로고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의 로고는 이제 8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이 데이비슨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이런 로고를 만들기도 물론 어렵지만 이런 로고에 생명을 불어넣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키의 공동 창업자인 필립 나이트와 빌 보어먼이 각각 육상 선수와 코치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이키의 디자인 철학을 이해하는 단서를 준다. 지금은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제조회사로 자리 잡았지만 1971년 무렵만 해도 나이키는 일본에서 운동화를 수입해 팔던 구멍가게 수준의 스포츠용품 매장에 지나지 않았다.

와플 기계로 찍어낸 운동화 밑창.

나이키는 단순히 멋진 신발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어떤 신발이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고 1초라도 더 기록을 앞당길 수 있는지, 어떤 반바지와 스커트가 땀을 더 빨리 흡수하고 건조할 수 있는지, 경기에 더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한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이 굳이 나이키를 고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어먼이 와플 모양의 운동화 밑창을 처음 만들었던 일화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아침, 보어먼이 아내가 와플을 굽는 걸 지켜보다가 운동화 밑창에 와플처럼 격자무늬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넣어 밑창을 만들고 이를 잘라내서 아교로 신발 바닥에 붙였다. 그게 나이키 와플레이서의 원조였다.

이 일화가 아직까지 나이키 디자이너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나이키의 혁신적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육상선수와 코치가 모여 만든 스포츠용품 회사, 탄력 있는 밑창을 만들겠다고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넣을 수 있는 무모함, 그리고 그런 무모한 아이디어를 기꺼이 수용하는 창의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2005년에 첫 선을 보인 나이키프리는 케냐가 왜 마라톤에 강한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연구 결과 케냐 어린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맨발로 뛰어다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맨발처럼 편안한 운동화를 고민하게 됐다. 기존의 운동화들은 충격을 흡수하고 발을 보호하긴 하지만 발을 튼튼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나이키프리는 신발 바닥이 발의 움직임에 맞춰 자유롭게 구부러지도록 홈을 파 넣은 것이 특징이다. 발등 부분에도 절개 구멍을 넣어 신발을 신고서도 맨발 같은 느낌이 나도록 했다. 발과 발목의 강도와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근육을 강화시켜 이상적인 발과 하체를 길러준다. 처음 신으면 한동안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이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부서를 이노베이션 키친이라고 부른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부엌이라는 의미에서다. 이곳을 진두 지휘하는 주방장, 틴커 하트필드 역시 육상선수 출신이다. 그는 특히 1976년 미국 올림픽 예선 장대높이뛰기 부문에서 6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전형적인 스포츠맨이다.

이노베이션 키친에는 모두 30여명의 ‘요리사’가 일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기에 앞서 스포츠를 이해할 것을 주문받는다. 이를테면 농구화를 맡은 팀은 일주일에 서너번씩 직접 농구 경기를 한다. 프로농구 경기장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길거리 농구에도 끼어든다. 직접 디자인한 농구화를 신어보거나 신겨보고 불편한 점을 찾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하트필드는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프로선수가 꿈이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부상을 당한 뒤 건축학을 공부했고 면허까지 땄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까 건축학이 평생을 바칠 만한 일인가 고민하게 됐다. 그가 대학시절 그의 코치였던 바우먼을 따라 나이키에 입사한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트필드는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오랜 선수 생활을 거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많았다. 건축 설계를 배운 덕분에 아이디어를 구현하는데도 탁월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존의 고정 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오늘날 나이키의 명성을 만든 나이키프리나 에어조던 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나이키에 입사해서 처음 했던 일은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꼭 맞는 신발을 만들어주고 싶었으니까요. 신발 디자인은 건축 설계와 비슷합니다. 꼭 맞는 신발이란 꼭 맞는 집처럼 그의 삶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조던은 신발 하나 신는데 굳이 그런 수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마이클 조던을 울린 에어조던.

조던에게는 신발이 충분히 많았고 신발 회사 사람들을 만나기에는 너무 바빴다. 어렵사리 조던을 만날 기회를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분위기는 딱딱했다. 하트필드는 조던이 늘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조던의 아버지가 그를 붙잡아두었고 그렇게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만든 신발이 에어조던 시리즈였다.

“조던의 경기를 관찰하면서 그가 고양이처럼 움직인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조던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몸놀림이 날렵했고 갑자기 튀어 오르기도 했죠. 언뜻 검은 표범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 발톱 같은 밑창에 고양이 털 같은 매끈한 표면, 그리고 검은 가죽을 덧댔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이미지를 담아낸 것이죠.”

조던은 하트필드가 만들어 온 신발을 처음 보고는 낄낄거리면서 웃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그렇게 한참 웃고 난 뒤 조던이 정색하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 말입니까.”
“내 어릴 적 별명이 검은 고양이었거든요.”

밑창에 공기방울을 집어넣은 에어조던은 그때까지 나온 다른 농구화들보다 훨씬 가벼웠고 조던의 요청에 따라 발목 높이를 4분의 3 정도로 줄였다. “그때부터 조던은 우리 신발만 신게 됐죠. 우리에게 뻣뻣하게 굴지도 않았습니다.” 1985년 첫 선을 보인 에어조던은 나이키의 최대 히트 상품이 됐다. 해마다 새로운 모델을 내놓아 벌써 에어조던22까지 나와 있다.

그때만 해도 미국 프로농구에서는 색깔 있는 신발을 신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조던이 신고 나왔던 에어조던3은 검정 바탕에 빨간색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너무나도 튀는 디자인이었다. 결국 벌금까지 물어야 했지만 조던의 몸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워 보였고 농구 팬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나이키 매장으로 달려갔다.

나이키의 디자인 철학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할 것(motion dynamic). 둘째, 새로운 차원의 형태나 형식을 창조할 것(New forms), 셋째, 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것(promote beauty), 넷째, 미래적 감각을 불어넣을 것(abstracted tradition).

나이키 스포츠연구소의 수석 연구원, 제프 피쇼타는 나이키프리를 개발하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잊어라’라는 도덕경 경구의 벽에 붙여놨었죠.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고 우리가 맞다는 걸 증명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실험을 거듭한 끝에야 맨발 같은 느낌의 완벽하게 새로운 신발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2000년 겨울에 나온 나이키 샥스는 밑창에 스프링을 단 독특한 디자인으로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신발 밑창에 스프링을 단다는 그야말로 초등학생들이나 할 만한 황당무계한 아이디어였지만 이노베이션 키친은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이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때는 1984년 여름. 이를 상용화하기까지는 무려 16년의 개발 기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나이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에어포스원’은 올해로 출시 25주년을 맞았다. 올해 1월, 3천개 한정판으로 만든 ‘에어포스원 럭스’는 한 켤레 가격이 200만원이 넘는데도 출시되자마자 동이 났다. 나이키 봄 모델이 출시됐던 3월에는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나이키 매장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래 내용을 추가합니다. 2010년 8월21일.)

나이키 이야기를 하면서 아동 노동 논란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96년 지금은 폐간된 잡지 라이프가 열두 살 소년이 축구공을 바느질하고 있는 사진을 내걸면서 파키스탄 공장의 아동 착취 실태와 나이키의 두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키는 세계화의 롤 모델 같은 기업이었다. 일찌감치 아웃소싱을 도입했고 일본과 한국을 거쳐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으로 낮은 인건비를 찾아 공장을 옮겨다녔다.

파키스탄 공장의 소년 소녀들은 하루 2달러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톨루엔과 아세톤 등 온갖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돼 있었다. 라이프 보도 이후 불매운동이 확산됐지만 나이키는 하청업체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나이키 대변인은 “나이키가 없었다면 그들은 땡볕 아래서 코코넛 수확을 하고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빈곤을 탈출할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이 급감하자 결국 물러섰다. 1998년 5월 나이키는 “그동안 나이키 제품은 노예노동, 강제잔업, 그리고 노동학대와 동일시되었다. 나는 미국 소비자들이 노동자가 혹사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구매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서 윤리 규범을 공개했다. 지금까지는 본사에만 적용했지만 모든 하청 공장 노동자들에게 확대 적용한다는 발표였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은 한겨레 HERI 리포트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나이키는 정말 중요한 교훈을 다른 기업들에게 남겼다. 세계화의 수혜를 입으려면 그에 합당한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키며 국제사회의 시민권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곧 범죄자로 낙인 찍혀 시장에서 퇴출되고 만다. 유치원에서 배울 법한 단순한 진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경영자들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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