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러, 냄비 뚜껑에 깃든 독일 장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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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값싸고 품질 좋은 주방용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독일에서 만든 냄비나 후라이팬, 압력밥솥 등을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중국까지 싣고 가서 팝니다. 당연히 우리는 가격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품질과 혁신, 디자인으로 승부합니다.” 휘슬러 국제 부문 디렉터, 스테판 뤼켄쾨터의 이야기다.

다른 많은 제조업체들처럼 주방용품 회사들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시아로 생산 공장을 옮겨왔다. 그런데 휘슬러는 아직도 철저하게 독일 현지 생산을 고집한다.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도 거부한다. 독일 사람들이 벤츠와 함께 휘슬러를 독일 제조업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휘슬러의 주방용품은 100% 독일에서 생산된다. 휘슬러 본사가 자리 잡은 이다오버슈타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전철로 3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인구 3만5천명의 작은 도시다. 알루미늄 제품은 이다오버슈타인에서, 스테인리스 제품은 이다오버슈타인에서 30km 떨어진 노이오브케 공장에서 생산된다.

휘슬러는 1845년 독일의 발명가인 칼 필립 휘슬러가 설립한 주방용품 회사다. 올해로 162년의 역사를 맞는다. AC닐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 주방용품 시장에서 휘슬러의 점유율은 18.3%,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에서 브랜드 인지도는 96.3%. 코카콜라와 마이크로소프트, 벤츠, IBM에 이어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주방용품.

휘슬러는 해마다 매출액의 6~8%를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동차나 전자제품 회사들 연구개발 투자가 5% 미만에 그친다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규모다. 휘슬러가 해외 진출을 거부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게오르그 탈러 사장은 2005년 12월 우리나라를 방문해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휘슬러의 핵심 생산 공정은 사내에서도 극히 소수 인원만 아는 일급 기밀입니다. 외국으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 이런 기밀을 유지하기가 어렵겠죠. 게다가 임금은 좀 싸겠지만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생산 비용이 5%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 숙련도나 충성심까지 감안하면 5% 아끼겠다고 굳이 해외로 나갈 이유가 없죠.”

휘슬러는 1600톤 무게의 순간 고압과 고온으로 열판을 삼중 결합하는 공정으로 냄비 바닥을 만든다. 스테인리스 사이에 알루미늄 판을 넣어 바닥 전체에 열을 고르게 전달할 수 있다. 프릭션 공법이라고 불리는 이 핵심 기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휘슬러가 생산 설비의 해외 이전을 꺼리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휘슬러는 지난 162년 동안 200여종 이상의 특허를 만들어 냈다. 거의 모든 제품과 모든 공정마다 특허가 등록돼 있지만 기술 유출을 꺼려 일부는 특허 등록조차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냄비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하는 기술 역시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른 주방용품 회사들이 휘슬러의 오랜 전통을 쉽게 추월하는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휘슬러는 바닥 면을 오목하게 만들어 열을 받으면 평평하게 팽창하는 오목 공법이나 열판의 가장 자리가 본체를 감싸도록 만든 캡슐 공법 등의 독자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에너지 효율이 50% 이상 높아진 덕분에 조리 시간이 70%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깔끔한 마무리 덕분에 열판이 부식되거나 이물질이 끼는 것도 막을 수 있다.

휘슬러는 또 크롬과 니켈이 각각 18%와 10%씩 들어간 스테인리스 코일을 쓴다. 다른 주방용품 회사들은 니켈 함량이 8%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휘슬러 주방용품의 바닥에는 모두 “18-10″이라는 함량 표시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니켈 함량이 높아 시간이 지나도 은빛 광택이 유지되고 녹이 슬지 않아 위생적이다.

“휘슬러는 다른 주방용품보다 훨씬 비싸지만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한번 사서 30년 이상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죠. 휘슬러는 생산 중단된 주방용품도 손잡이나 뚜껑 등의 부품을 충분히 확보해 두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애프터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말이죠.” 김정호 휘슬러코리아 사장의 이야기다.

휘슬러의 경쟁력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디자인에 있다. 매끈하면서도 날렵하고 세련될 뿐만 아니라 편의성을 배려한 부분이 돋보인다. 휘슬러의 모든 냄비에는 수증기를 차단하는 개폐장치가 달려 있다. 내용물이 끓어 넘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요리 종류에 따라 수증기의 배출 정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냄비 뚜껑을 손잡이에 걸쳐 놓도록 디자인한 인텐사 시리즈도 인기를 끌었다. 좁은 주방에서 냄비 뚜껑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서리에 홈을 내 뚜껑을 열지 않고도 국물을 따라낼 수 있도록 디자인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푸어링 림’이라고 부르는, 역시 휘슬러만의 독특한 디자인이다.

이밖에도 냄비와 뚜껑이 정확히 밀착돼 물 없이 야채요리가 가능한 것도 휘슬러 냄비의 특징이다. 대류현상을 이용해 냄비 안의 수증기가 수증기 막을 만들도록 디자인돼 있다. 높은 온도와 압력을 유지할 수 있어 조리 시간을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비타민과 미네랄 등의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육류 요리의 경우도 약한 불에서 예열을 한 다음 재료 자체의 수분과 기름만으로 요리를 끝낼 수 있다. 엠보싱 처리가 돼 있어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달라붙지 않는다. 뚜껑 위에 온도 센서를 장착해 뚜껑을 열지 않고도 조리 상태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한 부분도 돋보인다. 냄비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파란 불빛의 센서가 빨간 색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뚜껑 안쪽이 약간 볼록하게 돼 있어 뚜껑을 타고 올라간 수증기가 다시 냄비 안쪽으로 떨어져 음식 고유의 맛과 향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있다. 단열 처리된 손잡이는 요리 중에도 뜨거워지지 않아 맨손으로 들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약간 원뿔형으로 디자인돼 있어 같은 크기의 냄비도 겹쳐 놓을 수 있도록 돼 있다.

“소비자가 원하면 만들어 낸다.”

휘슬러는 단순히 주방용품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디자인에 반영해 왔다. “소비자가 원하면 반드시 만들어 낸다”는 디자인 원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게오르그 탈러 사장이 내건 “언제나 완벽하라(Perfect everytime)”는 캐치프레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휘슬러는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충실히 구현한다.

지난해 매출액이 1억4700만유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의 주방용품 회사지만 휘슬러의 전체 직원은 690명밖에 안 된다. 휘슬러는 철저하게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를 유지해 왔다. 휘슬러가 만드는 주방용품은 모두 500여종, 날마다 1만개가 넘는 제품을 생산해 이 가운데 50% 이상을 해외에 수출한다.

“가장 큰 도전은 3차원으로 생각하도록 엔지니어들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제조 공정 전반에 걸쳐서 말이죠. 3차원 디자인이 생산 효율을 높인다는 사실을 모두가 납득하기까지 꼬박 6개월이 걸렸습니다.” 생산 부문 총괄 매니저, 안드레아스 힐렌마이어의 이야기다.

휘슬러는 이를 위해 IBM의 디자인 소프트웨어, 카티아-V5를 도입했고 생산 효율성을 25%까지 높일 수 있었다.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공유하면서 디자인 단계부터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자인 원칙과 아이디어를 제조 공정 전반에 일관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휘슬러는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모듈식 공정을 활용한다. 제품마다 디자인을 따로 하는 게 아니라 본체와 뚜껑, 손잡이 등 다양한 모듈을 내놓고 현지 문화에 따라 이 모듈을 결합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낸다. 비용 절감은 물론이고 순발력과 유연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만 출시된 솔라 시리즈도 이렇게 개발한 모델이다.

솔라 시리즈는 가스레인지를 많이 쓰는 우리나라 주방 문화에 맞춰 손잡이를 더욱 길게 만들고 냄비 뚜껑을 더 높게 만들었다. 2~3인분 식사를 위한 소용량 압력밥솥도 우리나라에만 출시됐다. 진밥과 된밥 등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3단계로 압력을 조절할 수 있게 한 것도 국내 출시된 압력밥솥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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