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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코리아’를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26, 2007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상품이 있다.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렌의 이름을 따서 베블렌 효과라고 부르는 이런 유형의 상품을 우리는 흔히 사치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런 사치품을 ‘명품’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명품은 원래 예술 작품이나 장인들이 만드는 고급 수공예품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고급 패션 브랜드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게 됐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사치품’이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을 줄이고 소비자들의 선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명품’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장 영어만 봐도 우리의 ‘명품’을 번역할만한 단어가 마땅치 않다. 마케팅을 위해 변질된 의미를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면서 일반적인 의미로 굳어지게 됐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우리나라 ‘명품’ 소비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김 교수는 최근에 펴낸 ‘럭셔리코리아’에서 사치품의 소비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과시형이다. 과시형 명품 소비를 하려면 연 수입이 1억원 이상이고 재산세를 100만원 이상 납부하는 정도는 돼야 한다. 골프장이나 호텔 헬스클럽 회원권 등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은 익명의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명품을 소비한다. 김 교수는 “문화적 의미에서의 상류층은 없고 경제적 의미에서의 상류층만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도 이런 과시형 명품 소비를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유층들이 익명의 타인에게 자신의 계급을 효과적으로 과시하고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대중화된 명품 브랜드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10미터 바깥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베르사체보다 5미터쯤 접근해야 알아볼 수 있는 구찌가 더 고급 브랜드로 인식되는 것도 과시와 차별화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질시형이다. 이들은 흔히 ‘가짜 부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이 선망하는 집단에서 소비하는 물건을 구매하면 자신도 그 집단에 소속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명품을 구매한다. 이들은 부유층의 생활방식을 동경하고 모방하지만 구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구두면 구두, 가방이면 가방, 특정 품목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명품은 신분 상승의 대리만족 효과를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질시형 소비자들은 일단 구매를 결정하면 가격을 물어보지 않고 가격이 비싸도 놀라지 않는 척한다.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심리 때문이다. 오히려 과시형 소비자들은 스스럼없이 할인해줄 수 없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과시형 소비자는 고급이되 널리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찾지만 질시형 소비자는 남들에게 잘 드러나는 브랜드를 선호한다. 질시형 소비자는 또 판매원이 옆에서 계속 설명해주고 깍듯이 대우해주기를 기대한다.

셋째는 환상형이다. 이들은 명품을 소비하면 자신이 다른 자아로 변신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든다. 언뜻 질시형과 비슷하지만 질시형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유형이라면 환상형은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을 공포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명품 소비는 그 공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쉽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유형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환상형 소비자들은 과시형이나 질시형과 달리 향수나 화장품, 속옷, 스타킹 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품도 기꺼이 소비한다. 소비의 목적이 과시 보다는 자기 만족에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들이 구매하는 것은 화장품의 기능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약속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기능성이 뛰어난 저가의 화장품보다 ‘고급’의 상징성이 강한 고가 화장품이 더 강하게 어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디드로 효과라는 것도 있다. 철학자 드니 디드로가 실내복을 선물 받았는데 이 옷을 입고 책상 앞에 앉으니 책상이 허름해 보였다. 그래서 책상을 새로 사고 나니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렇게 의자와 선반, 액자 등등을 바꾸다가 서재 전체를 바꾸게 됐다는 이야기다. 새로 산 구두가 만족감을 주기 보다는 여기에 어울리는 옷 한 벌 있으면 좋겠다는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런 디드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철학자 기 드보르는 “소비재가 주는 만족은 끊임없이 다른 욕망에 의해 대체되는 기만”이라고 했다. 그래서 소비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비싼 사치품을 갈망하게 된다. 더 빛나 보이는 자신에 대한 갈망, 이렇게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소비물로 해결하려고 하면 사치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자정이 되면 신데렐라의 파티가 끝나는 것처럼 환상형 소비자들에게 사치의 쾌감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넷째는 동조형이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나 준거집단의 유행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김 교수는 이를 따돌림 당하지 않으려는 집단의식이나 뒤처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남들도 다 사니까’ 하는 식으로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합리화 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동조형 명품 소비는 청소년들에게도 많이 발견된다. 모조 명품, 이른바 짝퉁 소비가 유행이 되는 경우도 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환상형 소비가 상대적으로 적고 질시형 소비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일찌감치 “평등해질수록 더 질투하면서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평등의식이 높고 계층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에 부유층을 비난하는 경향이 많지만 막상 자신이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들의 행태를 추종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질시하는 감정은 질시 받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과시형 소비와 질시형 소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중산층이 부유층을 따라하기 시작하면 부유층은 더 소비의 강도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다. 과시형 소비자들은 질시형 소비자들과 차별화를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고 질시형 소비자들은 재빨리 이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이를 “차이화와 모방의 전진 과정”이라고 불렀다. 김 교수는 이를 과시의 욕망과 계급적 열등감 또는 시기심으로 이해한다.

“내가 페라가모를 하고 있는데 남들이 페라가모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샤넬로 도망가야 합니다. 샤넬을 쓰는 사람이 늘어나면 에르메스로 도망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치의 강도를 계속 높이는 것이죠. 빈센트&코 같은 가짜 명품이 스위스 명품으로 둔갑해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것도 이런 질시형 소비 유행 때문입니다. 누구누구가 빈센트&코를 한다더란 소문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유행을 만들어 낸 것이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이런 명품 소비 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김 교수는 “부에 대한 승복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택시 타고 타워팰리스 가자고 하면 택시 기사가 불친절하게 군다고 합니다. 누구나 타워팰리스에 살고 싶어하지만 정작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봅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부를 쌓은 존경 받는 부자가 많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죠.”

김 교수는 “당당한 사회라면 다른 사람의 소비를 감정적 편견이나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화감이 완화되려면 부의 축적과정이 투명해지고 조세제도를 비롯해 사회제도가 부의 재분배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부의 취득 과정에서 정당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부자를 존경할 수 없고 존경할 수 없는 소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럭셔리 코리아’의 결론은 “물건을 사는(買) 열정을 삶을 사는(生) 열정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명품 소비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 책의 결론으로는 언뜻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김 교수는 “우리 사회 소비의 양과 질은 30년 보다 월등히 좋아졌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에 비례해 늘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소비의 의미가 중요할수록 자신의 물질적 행복감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합리적으로 지출을 분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럭셔리 코리아 / 김난도 지음 / 미래의창 펴냄 / 1만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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