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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 스위스 시계에 패션을 입히다.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16, 2007

스와치 그룹의 회장인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없었다면 스위스 시계의 명성은 한갓 흘러간 옛날 이야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스위스 시계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스와치 그룹의 역사도 1970년대 중반을 끝으로 내리막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크다. 돌아보면 수백년을 이어 내려온 자부심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스위스는 1974년까지만 해도 1년에 9100만개의 시계를 만들어 팔았는데 10년 뒤인 1983년에는 4300만개 밖에 팔지 못했다. 절반 이상 판매량이 줄어든 셈이다. 세계 시계 시장에서 스위스 시계가 차지하는 비중도 43%에서 15%까지 뚝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1600여개의 시계 제조업체 가운데 1000개 이상이 도산했고 5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위기는 일본과 홍콩이 뒤쫓아 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눈 밝은 일본 사람들이 스위스 시계를 뜯어놓고 수백년의 노하우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이내 비슷한 스타일의 시계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스위스 사람들은 일본과 홍콩 사람들이 만든 시계를 싸구려에다 조잡한 시계라고 얕잡아봤지만 시장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스위스 시계는 한때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스위스 시계를 차고 있다는 건 특권 계층에 속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그 진입장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여전히 스위스 시계는 세계 최고였지만 10배 이상의 가격을 지불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스위스 시계의 시장 점유율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수은전지로 움직이는 디지털 시계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서 태엽을 감는 시계는 오히려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과 중국, 우리나라까지 잇따라 시계 산업에 뛰어들었고 스위스 시계의 수백년 역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제 누구나 시계를 갖는 시대가 됐고 그 시계가 굳이 스위스 시계일 필요는 없었다.

스위스 은행이 하이에크에게 구조조정 자문을 의뢰한 때가 바로 그 무렵, 1981년이었다. 스위스 시계 제조업체 컨소시엄은 스위스 은행에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었고 해외 매각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하이에크가 내놓은 대안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저가 시장에 주목할 것. 둘째, 시계에 패션 개념을 도입할 것, 셋째, 제조 공정을 최대한 자동화할 것.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켜나가는 것도 좋지만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저가 시장을 마냥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이에크는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문했다. “이제 좋은 시계를 만드는 것과 돈을 잘 버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잘 팔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들고 실제로 잘 팔아야 한다.”

하이에크의 충고를 받아들인 스와치 그룹은 이듬해인 1982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완벽하게 새로운 스타일의 시계를 내놓는다. 놀랄 만큼 정확한데다 완벽한 방수와 방충 기능을 갖추고 가격은 단돈 40달러. 게다가 그 유명한 스위스 시계가 아닌가. 일본과 홍콩 시계가 75달러 가까이 하던 때, 스와치 그룹의 모험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가격을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대대적인 공정 개선과 원가 절감의 노력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90개가 넘던 부품을 51개로 줄이는데 성공했고 케이스 안에 곧바로 부품을 조립하고 유리 덮개를 끼워 맞추는 새로운 공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스와치는 시계에 패션이라는 개념을 불어넣었다. 결혼식 때 장만해 평생을 차고 다니다가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그런 고급 시계가 아니라 유행에 따라 바꿔 차는 시계라는 의미에서다. 스와치(swatch)라는 이름의 ‘S’에는 스위스(swiss) 시계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정통 스위스 시계와 비교해 두 번째(second) 시계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사람들은 이제 넥타이나 목걸이, 모자를 고르는 것처럼 패션 소품으로 스와치 시계를 고르게 됐다. 정장이나 셔츠의 스타일에 따라 어울리는 넥타이가 다른 것처럼 이제 시계도 분위기에 따라 바꿔 차게 됐다는 이야기다. 스와치는 시계를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장치를 넘어 패션과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스와치는 1986년 하이에크가 시계 제조업체들의 컨소시엄, ASUAG을 인수하면서 바꾼 이름이다. 스와치 그룹에는 스와치뿐만 아니라 14개의 계열회사가 있다. 시장을 세분화하고 스타일을 차별화하는 전략이다. 다른 계열회사들이 스위스 시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면 스와치는 그 전통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방식이다.

고가 시계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브레게나 블랑팡, 자끄드로즈, 오메가 같은 명품 브랜드를, 가격을 약간 낮추려면 론진이나 라도를, 아예 중저가 시계를 찾는다면 티쏘나 미도, 해밀턴, 피에르발망, 캘빈클라인 등을 찾을 것이다. 모두 스와치 그룹에서 나오는 시계 브랜드들이지만 스와치는 이런 시계들과 차원이 다르다.

선명한 원색이나 부드러운 파스텔 톤이라면 차라리 점잖은 편이고 화려한 꽃무늬나 아예 다람쥐나 개구리, 도마뱀 등의 일러스트를 집어넣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얼룩덜룩한 무늬를 집어넣은 시계도 있다. 과시하는 듯한 현란한 색깔에 요란한 스타일은 눈에 띄지 않을래야 띄지 않을 수 없는 스와치만의 개성이다.

이런 튀는 스타일의 시계가 수십만원이라면 아무래도 망설여지겠지만 5만원 정도라면 모처럼의 주말 외출에 특별한 분위기를 내기에도 좋고 연인에게 선물하기에도 큰 부담이 없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를 사는 게 아니라 손목에 액센트를 주기 위해 시계를 산다. 스와치는 이런 욕구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스와치의 디자인 원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행을 선도할 수 있도록 젊은 감각을 지녀야 하고 활동적인 스포츠맨의 이미지를 담아내야 하고 깔끔하면서도 세련돼야 하고 동시에 스위스 시계의 클래식한 품격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게 바로 스와치가 세계 1위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비결이다.

스와치의 또 다른 매력은 다양성과 희소성에 있다. 스와치는 미국 뉴욕과 이탈리아 밀라노에 디자인 연구소를 두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해마다 200여종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낸다. 모델에 따라 다르지만 3만5천개 정도를 찍고 나면 아예 주물을 폐기 처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온갖 종류의 디자인이 쏟아져 나오면서도 각각 희소성을 갖는다.

1986년 120개 한정판으로 제작된 키키피카소라는 모델은 영국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2만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한정판이면서도 모두 다른 색깔을 써서 희소성을 높였다. 이밖에도 백남준이나 앤드류 로건, 비비안 웨스트우드, 타다노리 요쿠, 샘 프란시스 등 여러 디자이너와 화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스와치의 시계 디자인에 참여했다.

살펴보면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모델들도 많다. 장미 향기가 나는 시계, 멜빵에 부착하는 시계, 거꾸로 가는 시계 등등. 시계에 무선 호출기를 내장하거나 멜로디 알람기능을 추가하기도 하고 유명 영화감독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금속 소재의 모델이 인기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 있는 모델이라도 두 번 찍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 정도면 우표를 수집하는 것처럼 스와치 시계를 수집하는 마니아들이 생겨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해마다 봄과 가을, 스와치 새 모델이 출시될 무렵이면 세계적으로 스와치 매장에 젊은이들이 줄을 서는 것도 익숙한 모습이 됐다.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백금 소재의 시계는 발매 당일 모두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스와치는 1992년 20억달러 매출에 2억6천만달러의 이익을 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 덕분에 스위스 시계 산업의 점유율도 54.7%로 올라섰다. 스와치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추락하는 스위스 시계 산업을 살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디자인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위기를 이겨낸 사례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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