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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견문록, 첫번째.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4, 2007

“저기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들 보이시죠? 뱃머리가 왼쪽에 있으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는 배고 오른쪽에 있으면 인도나 중동, 유럽으로 가는 배입니다. 기름을 넣거나 짐을 옮겨 실으려고 잠깐 정박해 있는 것이죠.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오가는 배들은 모두 이 길목을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STX팬오션 싱가포르법인 최임엽 상무의 이야기다.

싱가포르 동부 해안에 있는 테마섹 타워 42층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컨테이너 항구와 그 너머로 드넓은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2005년 기준으로 이 항구의 물동량은 2320만TEU에 이른다. 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한 개 분량인데 2320만TEU의 컨테이너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지구를 세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가 된다.

싱가포르는 물류 중심지가 되기에 최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말라카 해협은 깊이가 평균 50미터, 폭이 최소 20k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인도네시아 바깥으로 돌아가려면 항로가 1500km 이상 늘어나게 된다. 이 해협을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크로드가 끝나는 이곳에서 이 배들은 연료를 보충하거나 환적 화물을 처리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짐들을 이곳에 풀어놓고 사우디아라비아나 네덜란드 등 최종 목적지에 따라 다른 배로 옮겨 싣게 되는데 이런 환적 물량이 싱가포르 전체 물동량의 85%를 차지한다. 세계 환적 화물의 5분의 1이 이 항구에서 처리된다.

이처럼 싱가포르 항구는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완벽한 자동화 설비 덕분에 트럭 한 대가 세관을 통과하고 하역을 끝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5분, 우리나라 부산항이 40분이나 걸리는 것과 비교된다. 배 한 척이 들어와서 환적을 끝내고 출항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이곳에서는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싱가포르 항만공사는 싱가포르 뿐만 아니라 11개 나라에 19개의 항만을 운영하고 있다. 물류 산업은 싱가포르의 전략 산업 가운데 하나다. 부두 이용료와 크레인 사용료 등 배 한 척이 들어와 지출하는 비용은 평균 70만달러. 하루에 평균 60여척 이상이 들어오니까 날마다 4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이야기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세계 3위 규모의 정유시설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인프라가 구축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가는 배들은 싱가포르까지 갈 연료만 채우고 출발했다가 이곳에서 나머지 연료를 채워 넣는다. 물론 가격도 훨씬 싸다. 굳이 연료를 처음부터 가득 채우고 무겁게 출발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싱가포르의 면적은 692㎢, 서울보다 조금 넓은 정도지만 인구는 460만명 밖에 안 된다. 이 조그만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490달러(2005년 기준)에 이르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싱가포르는 일찌감치 물류와 금융산업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했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흔히 우스개소리로 자신들을 ‘리콴유 주식회사의 종업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는 자조적이기 보다는 언뜻 자부심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콴유는 1959년 이후 50년 가까이 1당 독재체제를 이어오고 있는 인민행동당의 전 총리다. ‘리콴유 주식회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리콴유가 물러난 뒤 고촉통 전 총리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가 지금은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룽이 총리를 맡고 있다. 리콴유는 1990년 물러난 뒤 선임장관에 이어 고문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데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여전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흥선대원군 정도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말레이시아에 편입됐다가 인구 폭동을 겪으면서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다. 그때가 1965년, 가뜩이나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군대까지 떠나면서 싱가포르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때만 해도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채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다.

자원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고 땅도 비좁은 이 나라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은 사람이 바로 리콴유였다. 그는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치안과 환경을 통제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일찌감치 물류와 금융산업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도 그의 판단이었다.

싱가포르항만공사가 싱가포르 물류산업의 핵심이라면 테마섹홀딩스는 금융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테마섹은 100% 싱가포르 정부 소유의 국영기업이면서 싱가포르항만공사를 비롯해 싱가포르항공과 싱가포르개발은행(DBS), 싱가포르투자청(GIC), 싱가포르텔레콤 등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테마섹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인도네시아의 다나몬은행 등 여러 외국계 은행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하나금융지주회사의 최대주주도 바로 이 테마섹이다. DBS는 태국의 타이다누은행과 홍콩의 다오헹은행 등을 인수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GIC는 일찌감치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범위한 부동산 투자를 벌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알짜배기 국영기업들의 주인이 누구냐다. 테마섹의 사장은 리콴유의 며느리(리센룽의 부인)인 호칭이다. GIC의 이사회 의장은 여전히 리콴유가 맡고 있고 리콴유의 둘째 아들인 리센양(리센룽의 동생)은 최근까지 싱가포르텔레콤의 사장을 맡아왔다. 이 정도면 ‘리콴유 주식회사’라는 우스갯소리가 공연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리센룽 역시 총리가 되기 전부터 우리나라 한국은행에 해당하는 싱가포르통화국 총재를 비롯해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총리의 가족들이 권력을 세습하면서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인데 그런데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이에 특별히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투명성과 신뢰가 뒷받침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싱가포르의 독특한 정치체제와 관련, “싱가포르 국민들은 삶의 질을 올려주면 권력을 계속 보장해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집권당이 압승을 거두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민행동당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 84개 의석 가운데 82개 의석을 차지했다.

경제 발전이 정치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전통적인 정치발전 이론이 싱가포르에서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인민행동당의 실제 득표율이 66.6%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들어 리씨 왕조가 흔들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인민행동당의 장기 집권은 한동안 계속될 거라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해 4월, 선거를 한달 앞둔 무렵 20세 이상의 모든 국민들에게 소득 수준에 따라 200~800싱가포르달러(11만8천~47만5천원)의 성장 배당금을 지급했다. 경제 성장으로 세수가 늘어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싱가포르는 2005년 기준으로 4억3000만싱가포르달러의 재정 흑자를 냈다.

다분히 선거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었지만 국민들로서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2004년에는 3만명이 넘는 공무원들에게 반달치 급여를 특별 보너스로 나눠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저소득계층에게 최대 1200싱가포르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비롯해 50세 이상 중장년층과 퇴역군인에게 지원을 늘리는 정책을 검토 중이기도 하다.

“사실 싱가포르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어요. 이를 테면 이 나라에서는 길거리에서 껌을 씹는 것도 불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고 길거리가 더렵혀진다는 이유에서인데요. 그래서 말레이시아 국경에 나가면 껌 파는 잡상인들이 줄을 서 있어요.” STX팬오션 김훈 과장의 이야기다.

김 과장은 지난해 싱가포르 영주권을 취득했다. 외국인이 싱가포르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300만싱가포르달러 이상의 자산이 있고 310만싱가포르달러 이상을 싱가포르 은행에 예치하면 된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김 과장은 “여건만 된다면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영주권을 받으면 우리나라 국민연금과 비슷한 CPF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급여의 33%를 연금으로 내는데 이 가운데 고용주가 13%를 부담하게 된다. 그만큼 실질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갖게 된다. 또한 CPF를 통해 정부에서 보급하는 공공임대주택 집값의 80%까지 융자를 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집값의 2%만 최초 납입금으로 준비하면 된다.

김 과장 입장에서는 영주권을 받는다고 해서 딱히 다른 혜택이 더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도 세금은 똑같이 내고 김 과장은 주거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는 공공임대주택에 살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김 과장은 “싱가포르의 삶의 질, 무엇보다도 교육 여건 때문에 기꺼이 싱가포르 국민이 되기를 선택했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껌을 수입하거나 팔다가 적발될 경우 최대 징역 1년과 1천싱가포르달러(62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마약을 운반하거나 살인이나 총기 범죄 등의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사형 판결을 받는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심지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뒤 물을 내리지 않았을 경우에도 1천싱가포르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한 대만 맞아도 발기불능이나 불임에 걸린다는 태형 제도가 아직까지 남아있고 심지어 두 명 이상 모이는 모든 집회를 법으로 금지할 정도로 민주화 수준이 낮고 그만큼 노동조건도 열악하다. 언론 통제도 심해서 국경없는기자회는 세계 언론자유도 평가에서 싱가포르를 조사대상 167개국 가운데 140위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런데도 국민들 불만이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일자리가 넘쳐나고 있고 삶의 질이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높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한 달치 월급만 주고 미리 통보만 하면 누구라도 쉽게 해고할 수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그만두면 얼마든지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불만이 없다.

이와 관련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천달러가 넘는데도 정작 소득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 사무직 직원의 경우 월급이 우리 돈으로 90만원에서 180만원 정도 밖에 안 된다. 매니저 정도 되면 600만원 이상으로 올라가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임금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다.

“이 나라 국민들은 80% 이상이 정부의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돈으로 500만원만 있으면 입주할 수 있으니까요. 소득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물가가 높지 않고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니까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거죠. 게다가 국민연금이 잘 돼 있어서 노후 걱정도 많지 않습니다.” 미래에셋증권 싱가포르법인의 마케팅 매니저 릭탄의 이야기다.

리콴유 주식회사를 이해하려면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입시경쟁이 치열하다. 학교는 서열이 매겨져 있고 철저하게 성적순으로 진로가 정해진다. 대학에 진학하면 중산층을 넘어 특권 계층이 될 수 있지만 그건 일부 엘리트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우등생을 선별해 파격적인 장학금을 지원하고 필요할 경우 해외 유학까지 보내준다. 싱가포르에서 공무원은 단연 최고의 직장이다. 최고의 인재들이 몰려들고 그만큼 전문성도 높고 당연히 최고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리콴유 주식회사의 경쟁력을 구축한 일등 공신들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있겠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대학을 나오느냐 못나오느냐에 따라 원천적으로 한계가 분명합니다. 나라는 잘 살지만 국민들은 가난하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그렇지만 정부에서 의식주 가운데 주를 해결해주고 물가가 안정돼 있어 의나 식도 큰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체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능력에 따라 현실에 순응하는 방법을 익혀 왔다. 소득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생활수준이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불만은 많지 않다. 형편이 되면 좀 더 넓고 쾌적한 민간 주택에 들어가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번화가로 꼽히는 오차드로드에는 최고급 백화점과 세계적인 명품 매장들이 가득 들어서 있지만 이들의 주요 고객은 싱가포르 국민들이 아니라 외국인들이다. 싱가포르에서 소득수준의 차이는 흔히 소비성향보다는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느냐로 드러난다. 중산층의 욕망이 배출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해외여행인 셈이다.

싱가포르=글·사진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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