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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제왕’을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11, 2004

10억원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걸려면 변호사 선임료를 빼고 소송비용만 408만7400원이 든다. 인지대가 0.35%에 그밖의 수수료가 좀 붙는다.

10억원짜리 소송을 1천명이 함께 내려면 40억원이 넘는 소송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지면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한사람이 대표로 소송을 내면 나머지 소송 당사자들도 재판 결과에 따라 같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이른바 집단소송제다.

별볼일 없는 국선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클레이 카터는 어느날 눈이 뒤집힐만한 제안을 받는다. 마약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숨진 사람들 가족들과 합의를 주선해주는 대가로 어떤 제약회사가 1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80억원의 수수료를 주겠다고 한다. 회사 이름은 물론이고 약 이름도 알지 못한다.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보상금을 건네주고 사인만 받아오면 된다. 유족들에게는 500만달러, 60억원씩을 주겠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이 회사는 효과 좋은 마약 치료제를 만들었고 이제 곧 떼돈을 벌 전망이다. 문제는 부작용. 치료를 받은 몇몇 환자들이 살인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인다. 제약회사는 이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은폐하려고 한다. 클레이는 마약 치료제를 복용한 살인자의 변호인이었고 클레이가 만난 유족들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다.

60억원이면 꽤나 큰 돈이지만 진실이 터져나오면 이 회사는 훨씬 많은걸 잃어야 한다. 클레이는 진실을 은폐하는 일을 돕고 그 대가로 벼락부자가 된다.

클레이는 몇가지 정보를 얻고 이 시스템에 좀더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기업의 약점은 얼마든지 있다. 약점을 잡아내면 피해자들을 끌어모아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건다. 재판까지 갈 것도 없다. 적당한 가격에 합의를 보면 된다. 합의금액의 30~40%가 변호사의 몫으로 떨어진다.

관절염 치료제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 시장은 연간 1조5천억달러 규모. 이 약을 복용한 사람은 수백만명에 이른다. 문제는 5% 정도가 부작용으로 방광염을 일으키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방광염은 종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상태에 따라 환자마다 5만달러에서 20만달러까지 받아낼 수 있다. 역시 이 가운데 30~40%가 변호사의 몫이다.

클레이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미국 전역에 TV 광고를 때린다. 광고는 꽤나 충격적이다. “이 약을 쓴 사람들은 모두 검사를 받아봐라. 검사비용은 모두 우리가 댄다. 부작용이 발견되면 엄청난 손해배상을 받게 될 거다.”

전화 상담원들이 소송의뢰를 접수하기 시작하고 전국에서 수만명의 의뢰인들이 몰려든다. 제약회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이내 변호사들이 몰려와 합의를 제안한다. 우선 증상이 가벼운 사람들에게 6만2천달러를 배상하기로 한다. 여기에 곱하기 수천명. 그리고 30%의 수수료. 클레이는 그렇게 한달만에 1억6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272억원을 벌어들인다. 앞으로 증상이 심각한 사람들, 심지어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더하면 클레이의 몫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게 된다.

클레이는 이제 서른한살이다. 미국에서 가장 돈 잘버는 변호사의 반열에 오른 그는 수백만달러짜리 집을 사고 수천만달러짜리 자가용비행기를 산다. 초호화 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예일대 출신의 연봉 20만달러의 변호사들을 고용한다. 그리고 잇따라 기업의 약점을 캐내고 TV 광고를 하고 의뢰인들을 끌어모은다.

“돈을 모두 쓰지 말아요.”
“그럴 수야 없지, 그러기엔 너무 많거든.”

그러나 그 끝은 꽤나 비참하다. 첫발을 쉽게 내디뎠을뿐 기업 소송은 결코 만만치 않다. 손해배상 규모가 터무니 없이 커지면 회사는 아예 파산 신청을 하고 나자빠질 수도 있다. 배를 쨀 테면 째보라는 식이다. 파산까지는 안가더라도 합의가 안되고 끝까지 버티면 결국 정식 재판까지 갈 수도 있다. 재판에서 피해사실을 입증시키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학적 공방은 더욱 그렇다. 게다가 클레이 같은 애숭이 변호사는 법정 경험이 거의 없다. 합의가 안되면 막대한 비용을 뽑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더 큰 문제도 터져 나온다. 관절염 소송에서 6만2천달러, 우리 돈으로 7440만원을 받고 떨어진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주장하고 나선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병이 더욱 악화된다. 억울하게 죽을 병에 걸렸는데 겨우 7천만원이라니, 그것도 그 가운데 수천만원을 변호사가 수수료로 빼앗아 가버렸다. 그 변호사가 과연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자격이 있었는가.

기회를 노린 다른 변호사가 이들을 끌어모아 이제는 클레이에게 소송을 건다. 병이 악화되고 죽을 고비를 맞은 몇몇 피해자들은 최소한 수십억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클레이는 수천명을 묶어서 손쉽게 합의를 해버렸다. 탐욕에 눈이 멀어 서둘러 제약회사의 합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분별없는 탐욕이 불러온 의뢰인들의 손해는 결국 클레이가 배상해야 한다. 자승자박인 셈이다.

한때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클레이는 파산한 회사의 직원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한다. 이제는 온갖 신문이 그의 탐욕을 들춰내고 그의 몰락을 조롱하기에 바쁘다. 클레이의 회사도 결국 파산을 선언한다. 예일대 출신의 변호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클레이의 집과 자가용 비행기도 모조리 처분된다. 잠깐이나마 명예와 재산을 얻었지만 모든 것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서점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잠깐 들쳐 읽다가 결국 사서 들고 나왔다. 존 그리샴의 소설은 영화 같은 재미가 있다. 꽤나 두꺼운 책인데 읽는데 3시간 조금 더 걸렸다.

‘불법의 제왕’은 집단소송제의 반대 논리를 완벽하게 대변한다. 옛날에 취재를 해서 나도 집단소송제는 좀 안다. 기업들은 소송 남발과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집단소송법의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2002년 기준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을 당한 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이 지난해 기준 1조9000억달러(약 2100조원)나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은 집단소송이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2002년에는 모두 224건으로 전년대비 31%나 늘어났다. 더 곤란한 문제는 판결이 나기도 전에 소송에 휘말렸다는 뉴스만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도 흔하다는데 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집단소송제의 도입을 꺼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991년부터 1999년 6월 말까지 미국에서 제기된 전체 집단소송 1571건 가운데 82% 인 1291건이 화해로 종결됐다. 법원에 의해 기각된 것은 16%인 253건, 최종 판결까지 간 경우는 2%에도 못 미치는 27건이었다. 평균 합의금액은 830만달러, 이 가운데 변호사 비용이 평균 250만달러로 합의금의 30%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해 2005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된다. 분식회계나 주가조작 등으로 피해를 본 주주들이 50명 이상이고 발행 유가증권의 1만분의 1 이상을 보유하면 집단소송을 낼 수 있다.

존 그리샴은 해마다 한권씩 책을 낸다. 그의 책은 세계적으로 1억3천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 가난하지만 도덕적이고 입지전적이었는데 ‘불법의 제왕’에서는 좀 다르다. 클레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영혼을 팔았고 결국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혼을 팔았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어딘가 안타깝다.

참고 :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라. (이정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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