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못한 만큼 정부가 손해 배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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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S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 회사는 미국의 택배 서비스 회사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에서 택배 사업을 벌이려고 봤더니 이 나라는 우체국 택배가 너무 잘 발달돼 있다. 정상적인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UPS는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다. 정부가 우체국 택배를 부당하게 지원하고 있어 공정한 경쟁을 할 수가 없다는 취지에서다. 이 소송은 2000년부터 7년째 진행 중인데 아마도 UPS가 이길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송이 가능한 것은 1994년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교차 보조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교차 보조란 이를테면 우체국 택배의 경우 시골이나 산간벽지까지 우편물을 배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보조해주는 것을 말한다. 전기나 수도 등도 마찬가지지만 이익이 나지 않는다고 특정 지역을 공공 서비스에서 배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UPS 입장에서는 거리가 멀수록 더 많은 비용을 받아야 하지만 그러려면 우체국 택배와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우체국에 시골이나 산간벽지 사람들에게 자기들처럼 더 많은 비용을 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UPS는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250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캐나다에서 장사를 못해 손해를 본 만큼 캐나다 정부가 배상을 해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이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게 바로 북미자유무역협정이다.

만약 UPS가 승소하고 나면 공공 부문 전반에 걸쳐 비슷한 소송이 미구 쏟아질 가능성도 있다. 손해배상도 배상이지만 자칫 정부의 공공 서비스를 통째로 부정하거나 무력화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 같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던 멕시코에서는 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메탈클래드라는 회사가 폐기물 매립시설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는데 정부가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9천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재판까지 갔고 재심 끝에 멕시코 정부는 메탈클래드에 1560만달러를 물어줬다. 메탈클래드가 건축 허가를 받기도 전에 폐기물을 매립했던 공장 인근에서는 암 환자가 부쩍 늘어나고 기형아와 무뇌아가 태어나는 등 환경 질병으로 의심되는 현상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이 회사는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하기는커녕 멕시코 정부에게 엄청난 손해배상을 받아내서 유유히 떠났다.

에틸이라는 미국 화학 회사가 캐나다 정부를 제소한 사례도 있다. 캐나다 정부가 에틸의 석유 첨가제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유에서다. 에틸은 2억5천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결국 재판 끝에 캐나다 정부는 1300만달러를 물어줬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이런 재판이 세계은행의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나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에서 다뤄진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는 비밀주의 재판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정부는 이런 문제제기가 터져 나오자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다. 간단히 정리하면 “투자자 제소권은 일반적인 제도이며 우리 기업도 얼마든지 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특히 국정브리핑을 통해 잇달아 반대 논리를 쏟아냈다. “만약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제소를 당할 경우 우리 정부는 미국 상법에 정통한 국제 변호사를 고용해 실체적 진실을 다룰 것이다. 우리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근거 없는 속단이다.”

정부는 캐나다나 멕시코 정부에 기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입장이다. 잘못을 했으면 소송을 당해도 할 수 없는 거 아니냐는 무사태평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부당한 차별을 했거나 투명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밟지 않아 제소를 당했을 뿐 정부의 정당한 권한이 제약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환경이나 보건 안전 등은 소송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 펀드가 한미FTA 협정을 조속히 체결해 줄 것을 미국 의회에 요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만약 한미FTA가 통과되고 투자자 제소권이 보장되면 론스타는 굳이 우리나라 정부와 세금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게 된다. 정당한 투자 이익을 한국 정부가 가로막는다는 논리에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소송 역시 승소할 가능성이 크다.

외국 제약회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의약품 선별 보험등재 제도도 마찬가지다.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의약품을 미리 지정한다는 정책인데 이 경우 같은 효능에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외국 제약회사들의 의약품이 안 팔릴 수 있다는 반발을 거센 상황이다. 만약 투자자 제소권이 보장된다면 이들은 당장 이 사건을 국제 재판으로 가져갈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외국 제약회사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논리에서다.

호주 정부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투자자 제소권 조항을 삭제한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호주 정부는 이 조항을 포함하지 않는 대신 추후 상황변화가 있으면 고려하겠다는 정도로 합의를 봤다. 반면 우리나라 정부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이 조항을 빼기 위해 농업 등의 분야에서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했다는 분석도 곁들이고 있다.

그러나 남희섭 정보공유연대 대표는 “기대되는 이익의 무효화 또는 침해만으로도 무분별한 분쟁이 가능하다는 게 문제”라며 “합법적인 조치, 이를테면 세금 부과나 광고 규제, 불공정 거래행위 시정조치 등을 모두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경제, 문화, 환경, 보건 정책을 도입하거나 저작물의 공정 이용을 넓게 인정하거나 특허권의 권리 범위를 좁게 해석하는 법원의 판결 등이 모두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 대표는 “투자자 제소권 조항은 정부의 공공정책을 무덤으로 끌고 가는 저승사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는.

세계은행 안에 있는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는 한 나라의 법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초법적인 기관이다. 줄여서 ICSID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재판은 단 한번만 열리고 비밀리에 진행되며 배상액에 한도가 없다. 현재 ICSID에 계류 중인 전체 배상 청구 액수만 4천조 달러에 이른다.

1960년부터 2004년까지 처리한 투자분쟁 건수는 총 86건인데 피소국이 대부분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85건 가운데 32건이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고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5건, 칠레 3건, 콩고 3건, 그 밖에 몽고, 이집트, 엘살바도르, 파키스탄, 가봉 등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3세계 국가와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과 동유럽의 체제 전환국들이 대상이다. 청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초국적 기업들이다. 미국이 피소국인 경우는 단 1건인데 그것도 캐나다 기업에 의해서였다. 2000년대까지는 해마다 2~3건에 지나지 않았는데 2000년대 들어 한 달에 2~3건으로 분쟁이 늘어난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투자자 소송 제도가 초국적 기업의 경영 실패를 투자 유치국 정부나 그 나라 민중들에게 전가시키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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