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 불안과 성장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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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느냐로 요약된다. 성장의 방식을 놓고 첨예한 의견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논의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과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해 하반기와 멀리는 내년까지 우리 경제를 뒤흔들 5가지 변수를 살펴본다.

첫 번째 변수.
미국의 경제 불안, 세계를 위협하다.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미국의 경제 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 시장인 미국이 흔들리면 세계적으로 그 충격이 확산된다. 문제는 이미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난 미국의 부채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해 기준으로 8050억달러, 국내총생산(GDP)의 6.4% 규모까지 늘어났다. 순대외채무 역시 2004년 말 기준으로 2조5422억달러, GDP의 21.7%까지 늘어났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이 정도 부채는 정말 심각한 부담이다.

미국은 그동안 달러를 마구 뿌려대면서 이 엄청난 부채를 감당해 왔다. 달러가 기축통화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미국이 채권을 찍어내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대만 등이 이를 사들여 미국 경제를 지탱해 왔다. 외환위기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어느 한 곳이라도 미국 채권을 내다팔기 시작하면 달러 가치가 급락하게 되고 다 같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게 된다.

미국이 계속해서 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달러 자산이 이탈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다.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우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기준금리가 이미 5.25%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4년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17차례나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끝났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부에서는 FRB가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씩 두 차례에 걸쳐 5.75%까지 올릴 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역시 금리 인상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데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소비 위축을 마냥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은 달러 가치의 하락을 막는 동시에 경기를 끌어올려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 경제는 그동안 미국의 소비에 의존해 성장해 왔다. 미국은 빚을 늘려가면서도 소비를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였다. 다른 나라들은 기꺼이 돈을 빌려주면서 미국에 물건을 팔아왔다. 분명한 것은 이런 불균형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빌려주는 쪽이나 빌리는 쪽이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미국의 빚이 너무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소비가 늘어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세계 경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두 번째 변수.
무너지는 달러, 누가 덤터기를 쓸까.

미국이 엄청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제2의 플라자 합의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5개 나라가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 모여 달러 가치를 낮추기로 합의한 것을 말한다. 미국은 금리를 낮춰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로 했고 다른 나라들은 환율을 낮춰 상대적으로 화폐 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미국의 빚은 크게 줄어들었고 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다. 1985년 260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그 이듬해 150엔으로 폭락했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80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제품의 미국 수출 가격이 세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는 이야기다. 일본 기업들이 우리나라 기업들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일본은 금리를 낮추면서 내수 부양에 나섰지만 심각한 자산 거품을 낳았고 오랫동안 그 후유증을 앓았다.

무역적자와 경상적자,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최근 다시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빚을 탕감해 달라는 노골적인 요구다.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는 지난해 말, 우리나라를 포함한 20개 나라들이 자국 통화를 달러 대비 25% 이상 절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들의 기준에 따라 원화 가치를 19.2% 절상하면 원달러 환율이 700원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주장은 언뜻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 달러 가치의 급락이 자칫 미국의 경기 침체와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마냥 무시하기는 어렵다. 플라자 합의를 끌어냈던 1985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3.5%였는데 지난해에는 6.4%로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6.7%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서 미국의 외환 위기나 심지어 미국의 몰락 이후를 이야기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미국은 특히 엄청난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중국에 강한 압력을 넣을 것으로 보인다. IIE는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43.3% 절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선진 7개국 모임인 G7은 올해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회담에서 “세계경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신흥 국가들이 환율을 유연화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아시아 신흥국가와 석유수출국들의 환율 조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은 중국에 압력을 넣으려고 IMF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자존심 강한 중국이 순순히 미국에 굴복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환율 절상 대신 금리 인상으로 미국을 달래고 있지만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굳이 제2의 플라자 합의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달러 약세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그리고 그 충격을 세계 경제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변수가 된다.

세 번째 변수.
물가 잡으려다 경기 발목 잡을라.

올해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2002년 이후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적으로 소비자 물가가 동반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달러 약세로 상대적으로 원자재 가격의 부담이 컸고 소비자 물가도 그만큼 크게 올랐다. 올해 들어 미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를 웃돌아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미국 경제가 성장 둔화 사이클로 접어들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반갑지 않은 상황을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냉키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천명하고 선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올해 들어 세계적으로 금리 인상과 긴축 정책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지난 4년 동안 가파른 성장이 지속되면서 성장 여력이 고갈됐기 때문이고 둘째, 에너지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의 저가 공산품이 물가를 잡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넷째, 시중에 너무 많은 금융 유동성이 풀려있기 때문이고 다섯째, 경제 주체들이 모두 인플레이션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인플레이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중국은 생산과 고용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해왔다. 그런데 만약 중국의 생산성이 지금보다 더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중국의 임금 상승률은 이미 10%를 웃돌고 있다. 세계의 공장이라던 중국이 세계 경제의 화약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장 필립 코티스 OECD(세계경제개발기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 급등이 중국의 저가 공산품 수입에 따른 인플레이션 억제 효과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당장 중국이 인플레이션 수출국으로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대우증권 고유선 연구원은 “농촌과 비교할 때 소득 격차가 3.2배에 이르고 저축률 역시 무려 47%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금 상승 압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한동안 인플레이션이 확산되고 긴축 정책이 계속될 거라는 데는 대부분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바야흐로 세계 경제는 고유가와 고금리, 고물가라는 3고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자칫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의 악순환을 낳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공포 못지않게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많다는 이야기다.

네 번째 변수.
양극화 방치하고 내수 회복 가능할까.

전문가들 전망을 종합하면 세계 경제는 올해 하반기에 정점을 찍고 한동안 내리막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크다. OECD 경기선행지수는 여전히 상승 추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고 미국의 경기선행지수는 이미 올해 2월부터 추락하고 있다. 하나증권 곽영훈 연구원은 “미국 경제는 구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순환적으로는 경기 하강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미국이 세계 경제를 끌어내리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결코 좋지 않다. GDP 성장률은 올해 1분기 6.2%에서 4분기에는 4%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하반기 성장률을 당초 예상했던 4.6%에서 4.4%로 낮춰 잡았다. 이밖에도 경기 선행지수나 교역조건, 심리지표 등이 모두 경기 부진을 예고하고 있다. 소비 증가율 역시 올해 1분기를 정점으로 둔화되는 추세다. 실질 소득을 반영하는 국민총소득(GDI)이 2년째 줄어들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계 부채가 여전히 걸림돌이다. 부채비율은 2002년 이후 여전히 횡보 수준이다. 부동산 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난 데다 가뜩이나 금리가 오르면서 원리금 상환 부담도 크게 늘어났다. 정부가 소비 회복의 근거로 제시하던 신용카드 사용금액도 2004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만큼 소비 여력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한편 해외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올해 1분기 가계 부문의 해외소비는 지난해 4분기보다 11.5%나 늘어났다. 반면 국내 소비는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해외 소비가 단기적으로 국내 소비를 대체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소득 양극화가 불러온 소비 위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한동안 내수 회복이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수출이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인데 역시 기대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산업자원부는 수출 증가율이 올해 상반기 13.9%에서 하반기에는 10.0%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산자부는 원화 절상과 고유가에 따른 수출 채산성 둔화, 조업일수 부족 등을 수출 증가 둔화의 원인으로 꼽았다. 다행히 설비 및 건설투자가 회복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기를 선도할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다.

다섯 번째 변수.
가계와 기업의 양극화, 그리고 성장의 함정.

눈에 띄는 변화는 국민경제에서 기업의 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상장회사 순이익은 GDP의 7.5% 수준, 이 비율은 올해 1분기 8.1%까지 올라갔다. 사상 최고 수준이다. 기업 이윤과 요소비용 국민소득의 비교는 더욱 놀랍다. 1996년 8.5%에서 지난해에는 17.1%까지 늘어났다. 반면 임금소득의 비중은 63.4%에서 60.4%로 줄어들었고 이자소득 역시 26.8%에서 20.4%로 줄어들었다.

이자와 임금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은 가계의 체감 경기가 그만큼 위축된다는 걸 의미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력 강화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상장회사들 현금 유보율은 이미 400%를 넘어섰다. 상장회사들 현금성 자산 규모는 3월 말 기준으로 56조원,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다. 현금성 자산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설비투자가 부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늘어나는 것도 주목된다. 설비투자 대비 자본시장 투자비용의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30.3%까지 늘어났다. 실물 투자가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금융시장을 통한 관리비용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맥락에서 기업의 영업외수지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영업이익 대비 영업외수지의 비중은 2004년 10.6%에서 지난해에는 15.5%까지 늘어났다.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연구원은 “주식시장이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로 활용되기 보다는 기업의 잉여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자본의 효율성은 크게 늘어났지만 그 결과 주가와 경제 성장률의 상관관계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성장하지 않는데도 주가가 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설비투자를 줄여 현금성 자산을 쌓거나 자사주를 사들이고 배당을 늘리는 기업들의 주가가 오른다.

펜실베니아대학 제레미 시겔 교수는 일찌감치 이를 ‘성장의 함정’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시겔은 성장성이 투자 수익률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거꾸로 보면 투자 수익률이 장기적인 성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한미 FTA는 자칫 이 성장의 함정으로 우리 경제를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 이미 그 징후는 IMF 외환위기 이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성장의 한계를 맞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아무런 설비투자도 하지 않는데도 엄청난 이익을 내고 그 이익의 상당부분을 다시 금융시장에 쏟아 붓고 있다. 이 모든 게 제조업이 금융시장에 종속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그래서 기업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의 혜택은 배분되지 않고 소수의 투자자들에게 독점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성장에는 미래가 없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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