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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 LG필립스LCD의 고민.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6, 2006

LG필립스LCD는 요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 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업체들이 모두 비슷한 딜레마로 고민하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설비투자를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장치산업의 특성이다. 문제는 늘어난 공급만큼 아직 수요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체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판매단가가 갈수록 낮아지게 되고 결국 손해를 보면서 팔거나 생산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죄수의 딜레마’란 다른 방에 갇힌 두 명의 범죄 용의자들이 형량을 적게 받으려고 적극적으로 범행을 자백하는 경우다. 둘 다 입을 다물면 무죄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벌을 받겠지만 결국 모두 자백을 하고 똑같이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TFT-LCD 업체들 경우는 손해를 보면서 팔고 점유율을 높이거나 손해를 줄이려고 생산량을 줄이는 두 가지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증권가에서는 요즘 TFT-LCD산업의 시장 전망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이미 바닥을 쳤다는 전망 못지않게 앞으로도 한동안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때 최고의 성장산업으로 꼽혔던 TFT-LCD산업이 판매단가 하락과 공급 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대했던 월드컵 특수도 없었고 하반기 전망도 결코 좋지 않다. 세계적으로 인수합병 열풍도 불어 닥치고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LG필립스LCD가 2분기 실적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을 공식 발표한 때가 6월 12일. 이 회사는 TFT-LCD 패널 출하량 증가율이 당초 예상했던 20% 중후반에서 10% 중반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 것 같다는 공시를 내보냈다. 충격적인 발표였다. 공시에 따르면 TV 패널 출하량이 50%에서 25%로 줄어들고 판매 가격 하락률은 한자리수 중후반에서 10% 중반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EBITDA(법인세와 이자, 감각상각을 빼기 전 영업이익) 마진 역시 20%에서 10%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론 워라하디락사 부사장은 “일시적으로 생산량을 조정해 재고 부담을 덜고 단기 수급 상황을 개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감산 발표, 그야말로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회사 주가는 6월 12일 3만3천원에서 그 다음날 2만8700원까지 떨어졌다. 상장 이후 최저가였고 지난해 8월 5만600원과 비교하면 거의 반토막이 난 셈이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이른바 ‘어닝 쇼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인 데도 주가 폭락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가는 바로 바닥을 치고 올라서 일주일 만에 3만원대를 회복했다. 심지어 일부 증권사들은 2분기가 바닥이라면서 매수 추천을 내놓기도 했다. 목표주가는 여전히 4만원을 웃돌았다. 5년 만의 적자전환에 2분기 영업적자가 4천억원에 이를 거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시장은 이런 우려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시장의 기대와 달리 TFT-LCD 산업의 전망이 하반기에도 그리 좋지 않다는 데 있다. 가격 하락과 공급 과잉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40인치 TV 패널의 경우 지난해 10월 955달러에서 올해 7월에는 780달러까지 떨어졌다. 32인치의 경우는 565달러에서 390달러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1월 675달러와 비교하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19인치 모니터 패널의 경우도 235달러에서 135달러까지 떨어졌다.

상황이 이런데도 공급은 계속 넘쳐나고 있다. 우리나라와 대만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설비투자에 나서면서 생산용량이 크게 늘어난 탓이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주요 TFT-LCD업체들의 생산용량이 지난해 말 월 108만장 수준에서 올해 2분기에는 300만장 수준으로 세배 가까이 늘어났다. 올해 말이면 480만장, 내년 말이면 1천만장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과연 이만큼 수요가 따라주느냐는 것이다.

역시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TFT-LCD의 공급 초과율은 지난해 2% 수준에서 올해 2분기에는 5% 수준으로 늘어났다. 하반기에 조금 줄어들어 올해 평균은 4% 수준이 될 전망이다. 하나증권 최승훈 연구원은 “LG필립스LCD조차도 자금압박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6개 업체가 난립하고 있는 대만 업체들 경우는 조만간 인수합병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미 올해 4월 AUO가 퀀타디스플레이를 흡수합병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LG필립스LCD의 출하대수는 4440만대, 삼성전자는 4330만대, AUO와 컨타디스플레이의 합병회사는 4110만대가 된다. 여기에 대만 업체 CMO도 인수합병을 서두르고 있다. 이들 네 업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 수준으로 한동안 이들의 과점 구도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들이 모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당장 가격하락을 감당하기도 어렵고 생산량을 줄이기도 어렵다.

한국투자증권 민후식 연구원은 “TFT-LCD산업은 이미 초과이윤을 낼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했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나 휴대전화나 PDP(플라즈마표시패널) TV 등과 달리 상위 주요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이 낮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상위 3개 업체의 시장 점유율이 92.1%, PDP TV의 경우 78.9%, 휴대전화의 경우 62.3%인 반면, TFT-LCD의 경우 51.9% 밖에 안 된다.

문제는 시장이 상위 5개 업체 중심으로 과점화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업체들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지 않을 거라는 데 있다. 하나증권 최승훈 연구원은 “시장 과점화가 장기적으로 수익성 개선에 이바지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수익성 개선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연구원은 “특히 LG필립스LCD는 지난해부터 자금부족에 허덕여 올해는 자금압박이 심화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LG필립스LCD의 영업이이률은 올해 1분기 2.0%로 삼성전자 TFT-LCD 부문(4.0%)나 대만의 AUO(12.0%), CMO(15.4%)보다 훨씬 낮다.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가 선도적으로 7세대 라인에 투자한 것과 달리 대만 업체들은 아직 5세대나 6세대에 주력하고 있다. 선도적인 투자 결과가 감가상각비 부담과 수익성 악화, 자금 압박, 결국에는 영업적자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민 연구원은 아예 시장의 승자에게 투자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주식 투자자들에게 이왕이면 삼성전자를 사고 LG필립스LCD를 비중 축소 또는 당분간 관망할 것을 추천한 것이다. 민 연구원은 “LG전자가 PDP TV를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어 LG필립스LCD의 경우 상대적으로 판매 전략이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천문학적인 투자를 쏟아부었지만 구조적으로 경쟁력이 약화된 상태라는 이야기다.

한편 삼성전자는 TFT-LCD 사업부문에서 소폭이나마 흑자를 내고 있지만 8세대 라인 투자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 주우식 전무는 “40인치 TFT-LCD TV가 2천달러 미만으로 떨어지는 4분기 이후에는 시장이 살아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판매단가가 충분히 떨어지기까지 어떻게 버텨내느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익의 축소 또는 손실을 감당하거나 생산량을 줄이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40인치와 42인치, 2인치의 딜레마.

LG필립스LCD는 처음부터 42인치 TV에 주력했다. 일찌감치 42인치 PDP TV로 재미를 본 까닭에 TFT-LCD TV에서도 42인치가 표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들이 정작 TFT-LCD TV에서는 42인치보다는 40인치를 더 많이 찾으면서부터다. 40인치나 아예 37인치를 찾지 굳이 42인치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LG의 브랜드가 삼성이나 샤프 등에 뒤쳐진 까닭이기도 했다. 2인치의 프리미엄도 특별한 매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 와서 42인치 설비를 40인치로 줄이기도 어렵다는 데 있다. LG필립스LCD는 1950㎜×2250㎜의 패널을 뽑아내 42인치 패널 8장을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만약 40인치 패널을 만들어 내려면 나머지 패널 조각을 버리거나 아예 설비를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 40인치와 42인치의 시장 점유율 비중은 73대 17 정도다. LG필립스LCD는 결국 표준화에 실패한 셈이다.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7월 첫째 주 기준으로 40인치와 42인치 패널의 가격은 750달러와 780달러로 거의 차이가 없다. LG필립스LCD는 굳이 더 큰 패널을 만들면서도 마케팅과 수익성에서 모두 뒤쳐지고 있는 셈이다. LG필립스LCD 관계자는 이런 평가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내년부터 대만 업체들이 42인치 패널을 내놓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표준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투자증권 민후식 연구원의 전망은 좀 더 정곡을 찌른다. “당신이라면 2인치 더 큰 LG와 2인치 더 작은 삼성 가운데 어떤 걸 사겠는가. 결국 브랜드다. LG는 표준이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소비자들은 좀 더 친숙한 삼성을 선택했다.” 30인치대에서는 대만 업체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40인치대에서는 삼성전자에 뒤처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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