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못 사먹어 죽는 사람, 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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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에이즈 환자가 4천만명이 넘지만 그 가운데 제대로 치료를 받는 사람은 5%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약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약회사들이 내놓은 에이즈 치료제는 한 달 분량에 700달러 정도. 그런데 인도의 제네릭 약품을 만드는 제약회사들은 거의 비슷한 약을 30달러 미만에 만들 수 있다. 당장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약값이 없다. 700달러짜리 정품과 30달러짜리 짝퉁, 약효에 차이가 없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프리카에서는 물론 30달러짜리 짝퉁도 끔찍하게 비싸다. 수많은 사람들이 짝퉁조차 살 돈이 없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는다. 세계 에이즈 환자의 60% 이상이 사하라 사막 남쪽에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약값이 더 낮아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제약회사들에게는 영업의 문제겠지만 이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제네릭은 흔히 카피약이라고도 하는데 직접 연구개발해 만든 약이 아니라 이미 개발된 약 가운데 특허가 끝났거나 제조 방법이 알려진 약을 그대로 베껴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임상실험을 거쳐 개발하기가 어렵지 일단 개발만 하고 나면 이를 그대로 베껴서 제네릭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제네릭 생산 라인 하나 만드는 데 3천만원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문제는 우리나라 제약회사들이 대부분 손쉬운 제네릭에 몰려 있다는 데 있다. 특허를 확보한 오리지널 약품은 11종 밖에 안 되고 나머지 2만종 이상은 모두 제네릭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신약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산업 개방은 자칫 산업 자체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물론 환자들 입장에서는 오리지널이나 제네릭이나 아무 상관이 없다. 제네릭이 빨리 나와 값이 떨어지는 게 좋겠지만 의약품 특허는 국제적으로 최소 20년 이상 보호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꼼짝없이 제약회사들이 부르는 대로 주면서 오리지널 약을 사먹는 수밖에 없다. 인도나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는 특허를 무시하고 제네릭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특허권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벌이고 있는 태국에서는 최근 에이즈 치료제를 놓고 한바탕 거센 충돌이 벌어졌다. 태국에는 57만명의 에이즈 환자가 있다. 태국은 그동안 국영 제약회사에서 만든 제네릭 약품으로 이들을 치료해 왔다. 그런데 미국이 FTA의 협상 조건으로 제약회사들의 특허권 보호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30달러짜리 태국산 짝퉁의 유통과 판매를 금지하고 700달러짜리 미국산 정품을 수입해 사 먹으라는 이야기다.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앓다가 죽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태국 정부는 올해 1월 6차 협상이 벌어질 때까지 구체적인 협상 내용을 철저히 숨겨왔다. 이번에 드러난 내용은 과거 미국이 칠레나 싱가폴, 호주 등과 체결한 FTA와 거의 비슷하다. 핵심은 제약회사들의 특허권 보호를 더욱 강화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태국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볼 때 미국의 요구가 상당 부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한미 FTA 협상과 관련해 세부 내용을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미국 의회 조사국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태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요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의약품 개방 등 4대 핵심 쟁점과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가 이미 미국 쪽 요구를 이미 상당 부분 수용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의약품 분야에서 한미 FTA는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불리하다. 미국의 의약품 관세율은 1% 수준인데 우리나라는 원료 의약품의 경우 5.5~6.5%, 완제 의약품의 경우는 8% 수준이다. 관세가 폐지될 경우 우리 제약회사들의 미국 수출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되지만 미국 제약회사들의 국내 진출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의약품 개방과 관련한 미국의 요구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리지널 약값을 더 올리라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른바 혁신적 신약 15종을 지정해 미국 등 선진 7개국의 평균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76% 수준 밖에 안 된다. 미국은 혁신적 신약 지정을 더 늘리고 가격도 평균 수준까지 끌어올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보험 급여 제한을 완화하라는 것이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비싼 오리지널 약품의 처방이 제한돼 있는데 이를 없애면 미국 제약회사들의 오리지널 약품 수요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셋째, 특허권 보호를 강화하라는 것이다. 미국은 20년의 특허 기간은 물론이고 특허권 심사에 소요되는 기간까지 특허 기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넷째, 제약업계의 리베이트 관행을 없애라는 것이다. 물론 뿌리뽑아야 할 잘못된 관행이지만 자칫 경쟁력 없는 국내 제약회사들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의 요구는 간단히 정리하면 미국 제약회사들의 오리지널 약품이 더 잘 팔리도록 하고 국내 제약회사들의 제네릭 개발을 최대한 어렵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핵심 논리는 특허권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자칫 국내 제약산업이 송두리째 미국에 종속될 상황이다.

미국 제약회사들이 특허권 강화를 요구하는 논리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2천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으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특허권이 보호돼야 연구개발 비용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허권 없이는 이윤이 없고 이윤 없이는 연구개발도 없다. 특허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지금 나와 있는 약 가운데 65%가 아예 개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발되더라도 60%는 상용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제제약회사연합 하비 베일 사무총장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절반 정도만 맞다. 특허권 보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챙겨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1999년 기준으로 미국의 상위 12개 제약회사는 전체 매출의 12.4%를 연구개발 비용으로 썼는데 마케팅과 관리 비용이 34.3%나 됐다. 엄살을 떠는 것과 달리 연구개발 비용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연구개발 비용에 비교할 때 이익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이야기도 된다.

제약회사들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남기는지 추정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2000년 8월 기준으로 에이즈 환자 한명에게 들어가는 의약품 비용은 연간 1만439달러였다. 그런데 브라질에서 제네릭을 만들어 내면서 약값 인하 경쟁이 시작됐다. 브라질은 물질 특허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약품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이 약을 쓰면 비용이 연간 2767달러로 거의 4분의 1 수준까지 줄어든다.

결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오리지널 약품을 만드는 회사들도 그 이듬해부터 약값을 크게 낮췄다. 그 뒤 2001년에는 인도에서 또 다른 제네릭 약품이 350달러에 팔리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역시 인도에서 201달러짜리 제네릭 약품이 나오기도 했다. 나중에는 168달러까지 떨어졌다. 결국 이 약의 실제 생산 비용은 168달러가 채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오리지널 약품의 가격도 562달러까지 16분의 1 가격으로 낮춰 팔게 됐다.

좀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면 타미플루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미플루는 스위스의 로슈가 만든 조류독감 치료제다. 문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나라들이 앞 다퉈 이 약을 사들이면서 공급 물량이 턱없이 달린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인구의 1.5%인 72만명 분을 확보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류독감이 유행할 경우 약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조류독감의 예방 방법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만큼 자칫 끔찍한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과거의 페스트를 생각하면 쉽다. 미국은 이미 전체 인구의 절반 수준인 1억5천만명 분을 확보하고 있고 일본은 4%에서 20%로 목표를 높여 잡았다. 이밖에도 영국이나 프랑스, 캐나다, 홍콩 등은 이미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확보했거나 목표로 잡고 물량을 사들이고 있다.

타미플루는 발병 즉시 먹어야 효과가 있는데 로슈의 생산량은 연간 3천만명 분밖에 안 된다. 게다가 가격도 1캅셀에 2500원 정도로 결코 싼 편이 아니다. 당장 약을 충분히 사들여야 하는데 필요한 만큼 약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물론 로슈 말고도 이 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제약회사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로슈의 특허권은 어디까지 보호돼야 할까. 이 약은 과연 로슈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로슈는 세계적인 여론에 밀려 지난해 12월 중국과 인도 등 12개 제약회사에 타미플루의 제네릭 생산 권리를 부분적으로 양도하기도 했다. 로슈가 권리를 양도하지 않으면 특허를 무시하고 무단 생산하겠다는 압력이 거셌기 때문이다. 국제법에는 특허권 보호뿐만 아니라 강제실시라는 규정도 있다. 비상사태나 공공·비상업적 목적인 경우 정부 차원에서 특허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베트남은 2001년 에이즈 감염 증가율이 57%에 이르자 강제실시 규정을 활용해 제네릭 약품을 대량 생산했다. 짐바브웨 역시 이 규정을 활용해 제네릭 약품을 대량 생산하고 에이즈 치료 비용을 1168달러에서 400달러까지 줄일 수 있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역시 탄저균 소동이 일어나자 미국은 독일 바이엘사의 탄저병 치료제 가격이 너무 높다면서 바이엘사의 특허권에 대해 강제실시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과 관련해 강제실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가 무산된 바 있다. 2001년 노바티스는 글리벡을 출시하면서 한 알에 2만5천원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4알이면 한 달 약값만 300만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백혈병 환우회 등은 10분의 1 가격의 인도산 제네릭을 수입하자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비용은 고스란히 건강보험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만약 이처럼 특허권이 보장되지 않거나 계속해서 제약을 받을 경우 제약회사들의 이익 규모가 줄어들고 아예 연구개발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의학협회에 따르면, 1967년에 미국에서 백신을 생산하는 기업 수는 26개였는데 지금은 5개 밖에 안 된다. 에이즈 치료제를 만드는 회사가 6개 밖에 안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돈이 안 되는 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제약회사들의 관심은 완치가 어려운 고혈압이나 당뇨병 치료약 같은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나 발기부전과 대머리 치료제 같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서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약, 두 종류에 집중돼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날마다 수만명이 이름 모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지만 아무도 이들을 위해 약을 개발하지 않는다. 비싼 약이 팔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허권이 보호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 원리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장 원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우리나라 정부가 한미 FTA 협상과 제약산업 개방과 관련 선택해야 할 분명한 원칙은 있다. 미국 제약회사들의 이해와 우리나라 환자들, 더 나아가 우리나라 복지 예산 가운데 어느 편에 설 것이냐다. 더 본질적으로는 특허권과 생명권이 충돌하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하느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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