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 않으면 먹히는, 철강 공룡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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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는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였다. 조강 생산량 기준으로 1998년과 1999년, 2001년에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2년에 3위로 밀려난 데 이어 2003년에는 5위까지 밀려났다. 지난해에는 4위로 올라섰지만 1위와의 격차는 아직도 꽤나 크다. 흥미로운 것은 포스코의 조강 생산량이 2001년 2800만톤에서 지난해 2971만톤으로 조금이나마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데 다른 회사들이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부풀렸기 때문이다. 더 몸집을 부풀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바야흐로 철강 공룡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철강회사 인수합병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꽤나 복잡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다. 열풍의 시작은 1995년 이탈리아의 리바가 일바를 인수하면서부터다. 27위였던 리바는 조강 생산량이 1750만톤으로 늘어나면서 단숨에 5위로 올라섰다. 그 이듬해인 1996년에는 독일의 티센이 크루프를 인수해 조강 생산량이 1660만톤까지 늘어났다. 6위로 올라선 티센크루프는 리바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1997년부터는 메이저 업체들이 인수합병 대열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룩셈부르크의 아베드는 1995년 독일의 스탈베르케브레멘을 인수한 데 이어 1997년에는 스페인의 아세라리아를 인수합병해 3위로 올라섰다. 1998년에는 5위였던 프랑스의 위지노가 벨기에의 카커릴삼브레를 인수해 아베드를 누르고 3위로 올라섰다. 1999년에는 6위였던 영국의 브리티시스틸이 25위인 네덜란드의 후고벤스와 합병하면서 코러스로 이름을 바꿨다. 이 회사도 단숨에 4위로 올라섰다. 코러스는 조강 생산량은 1999만톤인데 최근 러시아 최대의 철강회사인 에브라즈(1220만톤)와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1999년 바오스틸이 소규모 철강회사들을 인수합병해 7위로 올라섰다. 중국에서는 정부 주도로 대규모 인수합병이 진행됐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7월 신철강정책을 발표하고 830개에 이르는 철강회사들의 자진 폐업과 합병 또는 대형화를 유도했다. 그 결과 최근에는 안강스틸과 벤강스틸이 합병해 바오스틸을 따라잡기도 했다. 합병회사인 안벤스틸의 조강 생산량은 3천만톤, 거의 포스코에 맞먹는 수준까지 늘어났다.

일본에서도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2002년에는 가와사키스틸과 NKK가 합병해 JFE가 탄생했다. JFE의 조강 생산량은 2960만톤으로 3290만톤의 신일본제철에 맞먹는 규모다. 신일본제철은 스미토모스틸을 비롯해 니신스틸, 고베스틸 등과 적대적 인수합병을 공동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제휴를 맺기도 했다.

인수합병 돌풍의 진짜 주인공은 네덜란드의 미탈스틸과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라고 할 수 있다. 두 회사는 모두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업계 1, 2위를 휩쓸면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미탈스틸은 인도 출신의 라크시미 미탈 회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만든 회사다. 지난해 이스팟과 LNM홀딩스, ISG 등 3개의 철강회사들이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이 회사는 2위에서 가볍게 1위로 올라섰다. 이스팟과 LNM 홀딩스는 둘 다 미탈 회장 개인 소유의 회사였는데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해 카자흐스탄과 멕시코, 트리니다드토바코 등 11개국 16개 철강회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ISG는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윌버 로스가 LTV스틸과 애크미스틸, 베들레헴스틸, 와이어톤 등 미국의 부실 철강회사들을 합병해 만든 회사였다.

미탈스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캐나다의 스텔코, 우크라이나의 크리보리스틸, 중국의 후난발린스틸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결국 미탈스틸의 조강생산량은 5천만톤에서 7천만톤까지 늘어났다. 미탈스틸의 본사는 네덜란드에 있고 미텔 회장과 그 가족들이 여전히 88%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미탈스틸에 밀려 2위가 된 아르셀로 역시 인수합병으로 큰 회사다. 아르셀로는 한때 3위를 놓고 다퉜던 위지노와 아베드가 2001년에 합병해 만든 회사다. 여기에 2004년에는 브라질의 CST와 아르헨티나의 아신다까지 집어삼켰고 올해 2월 캐나다의 도파스코까지 끌어들이면서 확고부동한 2위로 떠올랐다. 아르셀로의 조강 생산량도 5천만톤 이상으로 늘어났다. 3위인 신일본제철과의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1980년과 비교하면 세계 10위권 철강회사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회사는 신일본제철과 US스틸 밖에 없다. 5위였던 베들레헴스틸이 미탈스틸에, 9위였던 위지노가 아르셀로에 각각 합병돼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회사들은 모두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흔히 1945~1973년을 세계 철강산업의 성장단계로 본다. 그때만 해도 연 평균 성장률이 6.8%나 됐다. 그 뒤 2000년까지는 성장률이 0.6%에 머무는 심각한 정체단계가 계속됐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중국과 인도, 남미 등의 경제 성장과 맞물려 새로운 성장단계가 시작됐다. 문제는 과거와 달리 수요가 늘어나는 것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8년 이후 10개 이상의 대형 철강회사가 부도를 맞았고 일본에서는 공급 과잉으로 만성적인 불황을 겪어야만 했다. 중국과 인도 등 후발 철강회사들이 공격적으로 설비 투자에 나서고 수출을 늘리면서 철강 가격이 생산원가 수준으로 떨어진 탓이다. 철강가격은 호된 구조조정을 겪은 뒤 2002년에야 겨우 바닥을 쳤다. 그 과정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일본의 철강회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집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몸집을 키우면 수요 확보는 물론이고 철광석 등 원자재를 구매할 때 협상력을 키울 수 있다. 시장 지배력도 높아지고 장기적으로는 경쟁을 완화시켜 철강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여러 나라에 걸쳐 생산 공장을 확보하고 있는 회사들은 반제품은 원료가 가까운 나라에서, 완제품은 소비 시장이 가까운 나라에서 생산해 생산원가를 줄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르셀로의 경우 브라질에서는 슬래브를 생산하고 유럽에서는 강판을 생산한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특정 지역의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인수합병이 유행이었다면 최근에는 철광석 등의 원자재 확보 또는 제품의 품질과 생산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전략으로 상위 업체들끼리 합종연횡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국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눈에 띄게 수요가 둔화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지금부터다. 1위인 미탈스틸이 2위인 아르셀로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올해 1월 26일의 일이다. 미탈스틸은 인수가격으로 186억유로(220억달러)를 제시했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조강 생산량이 무려 1억2천만톤, 세계 생산량의 10%에 이르게 된다. 2위가 될 신일본제철의 거의 3배에 이르는 규모다. 세계 철강회사들이 발칵 뒤집힌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두 회사의 합병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아르셀로의 최대주주는 5.6%를 보유한 룩셈부르크 정부다. 이밖에도 벨기에 정부가 3.2%를 보유하고 있고 그 밖의 우호지분이 12.9% 정도 더 있다. 미텔은 주당 28.2유로를 제시했는데 인수합병 소식이 퍼지면서 주가가 22유로에서 30유로를 훌쩍 뛰어넘었다. 인수합병 비용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아르셀로 이사회도 만장일치로 반대를 선언했고 노조도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 정부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미탈스틸은 EU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룩셈부르크 정부 등 주요 주주들을 설득하고 2분기 내에 인수합병을 마무리 짓는다는 계획이다. 세계 철강회사들 반응은 중립적이다. 세계적으로 철강 가격이 안정될 거라는 기대가 있는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데 따른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이다. 미국 철강 노조는 이미 찬성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심을 끄는 건 무엇보다도 꿋꿋이 홀로서기를 해왔던 포스코의 인수합병 가능성이다. 미탈스틸과 아르셀로의 합병이 성사되면 포스코는 당장 신일본제철에 이어 3위로 올라선다. 조강 생산량 1조2천만톤 규모의 1위와 3천만톤 규모의 2, 3, 4위 업체들이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포스코 역시 생존을 위한 인수합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구택 회장이 “우리가 거꾸로 인수합병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먹지 않으면 먹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스코의 최대주주는 5.7%를 보유한 얼라이언스캐피탈이다. 국내 주주로는 2.9%를 보유한 SK텔레콤과 2.8%를 보유한 포항공대 정도가 있다. 이밖에도 국민연금이 2.8%,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물량이 8.1% 있다. 증권가에서는 국내 기관투자자 지분을 포함해 포스코의 우호 지분을 최대 28%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반면 외국인 지분 비율은 거의 70%에 육박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포스코도 얼마든지 적대적 인수합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삼성증권 김경중 연구원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라는 전제 아래 미탈스틸이 포스코에 손을 뻗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미탈스틸은 인도에 10조원을 들여 제철소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 돈으로 포스코를 인수하면 포스코 뿐만 아니라 포스코의 인도 제철소도 사게 되고 인도에서의 경쟁도 훨씬 수월하게 됩니다. 미탈스틸 입장에서는 이미 인도에 진출해 있는데다 첨단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포스코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겠죠.”

그러나 대신증권 문정업 연구원의 견해는 다르다. “포스코 지분 1%만 사려고 해도 2천억원 이상 자금이 필요합니다. 우호 지분을 모으기도 쉽지 않을 거고 국내 정서 등을 감안할 때도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물론 포스코의 공식 입장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정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수합병에 나설 계획이나 인수합병 당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언급을 꺼리고 있다. 다만 이구택 회장이 직원 회의에서 “주가가 20% 이상 오르면 인수합병 당할 걱정은 없다”고 말한 것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주가가 20% 이상 올라서 시가총액이 신일본제철이나 아르셀로를 추월하게 되면 쉽게 넘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다.

증권가에서는 포스코가 우호 지분 확보와 경영권 안정을 위해 주주 가치를 높이는데 더 신경을 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포스코는 2001년부터 해마다 2% 이상 자사주들 사들여 소각해 왔다. 지난해에는 주당 6천원의 파격적인 배당을 실시하기도 했다. 배당성향은 25%였는데 올해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기대가 확산되면서 주가가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이 회장의 회의 발언이 흘러나왔던 14일에는 6.1%나 뛰어오르기도 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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