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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를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ne 19, 2004

무려 2억달러. 돈을 마구 쳐바른 헐리우드 영화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그저 그런 흥미거리 영화로 흘려넘기기엔 우연의 일치와 암시가 제법 절묘하다.

3200년전 고대 그리스 시대, 세계 정복의 야심을 품은 미케네는 연합군을 맺어 트로이에 쳐들어 간다. 전쟁의 이유는 좀 어이가 없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났고 이 전쟁은 그에 대한 복수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형제다. 이들에게 사실 바람난 헬레네는 그냥 핑계다. 트로이는 해상무역의 시대,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트로이를 집어 삼키면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그의 욕심에 1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트로이를 침공한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2003년 3월, 이른 바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연합군을 결성해 이라크에 쳐들어간다.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영국과 스페인, 한국이 이 어처구니 없는 전쟁에 함께 뛰어든다. 여기서도 대량 살상무기는 그냥 핑계다. 후세인이 잡히고 대량 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참담한 전쟁은 이라크의 석유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라크를 무너뜨리면 미국은 세계 석유시장을 쥐고 흔들 수 있다. 조지 부시의 무모한 욕심에 지난 1년 3개월 동안 800여명의 미국 군인과 1만1천여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이 죽어나갔다. 특히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벌어진 포로 학대 사건은 이 전쟁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저버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다행히 영화 ‘트로이’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왕국의 파멸과 수많은 백성들의 죽음 앞에서 새삼 결연해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전쟁은 현실이고 싸우다 죽을지언정 어디에도 더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그래서 전쟁은 참혹하고 잔인하다.

그리스의 전쟁 영웅 아킬레스에게도 전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스의 편에 서든 트로이의 편에 서든 명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도망간 왕비 헬레네도 이라크의 무궁무진한 석유도 수없이 죽어가는 군인과 민간인들의 죽음을 조금도 해명하지 못한다. 다만 역사에 길이 남을 전쟁이라는 이유로 아킬레스는 전쟁에 뛰어든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지만 역사에 어떻게 남을 것인가 아킬레스는 늘 고민한다. 명분은 없지만 그의 죽음은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다.

그러나 트로이의 목마가 없는 이상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미 졌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도 졌고 도덕적으로도 졌다. 더이상 크게 얻을 것도 없다. 스페인이 이미 군대를 철수한데 이어 영국도 군대 철수를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쟁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다. 미국은 유엔을 트로이의 목마로 끌어들일 계획이지만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훗날 역사는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 명분 없는 전쟁에서 우리가 맡을 역할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할 계획이다. 전쟁의 두려움이 무색하게 한번 한 약속이기 때문에 결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들도 있다.

헥토르가 죽고 난 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밤 깊은 시간에 적군의 감시를 넘어 목숨을 걸고 아킬레스를 찾아온다.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죽인 아킬레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아들의 시체를 내달라고 부탁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영웅이다. 장례는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적에게 자비를 부탁하는 프리아모스는 결코 비굴하지 않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 그는 위엄을 잃지 않았고 왕국을 잃을지언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킬레스는 말한다. “당신이 우리 왕보다 낫소.”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체 앞에서 잠깐 눈물을 흘리고 프리아모스를 시체와 함께 돌려보낸다.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12일 동안 두 나라는 휴전에 합의한다.

안타깝게도 이라크 전쟁에는 그나마 영웅도 없다. 더러운 욕망과 비굴한 타협이 넘쳐나고 처절한 학대와 복수가 되풀이 된다. 욕망에 눈이 먼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스는 말한다. “당신이 직접 나가서 싸우시오. 그럼 전쟁이 끝나고 세상도 달라질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말할 용기도 없다. 우리는 이 추악한 전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미국에게는 우리의 그런 동의가 곧 전쟁의 명분이다.

미국은 결국 베트남 전쟁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전황은 이미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로 치닫고 있다. 이 전쟁에서 미국에게는 어떤 영광도 없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지금 그렇게 완성되고 있다.

도망쳐 나온 철없는 동생을 살리려고 헥토르는 비겁하게 적을 찌른다. 그의 표정은 참담하다. “너는 사람이 죽는 걸 봤느냐. 사람을 죽여 봤느냐. 나는 죽는 걸 봤고 직접 죽이기도 했다. 인간이 죽는 일에는 아름다움도 영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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