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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30, 2006

이 영화를 친일 영화라고 매도하는 것도 우습지만 생각없이 마냥 열광하는 것도 선뜻 이해가 안 된다. ‘청연’은 볼거리가 많은 재미있는 영화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언짢고 불편했다.

박경원의 연인, 한지혁은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콜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택시 운전을 하던 박경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군대에 끌려가 일본군 장교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에서 성공한 정치인이다. 1925년 무렵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박경원은 물론이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가 입은 말끔한 군복에 아무런 거부감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학지혁과 박경원은 다시 우연히 만나고 함께 술집에 놀러가 신나게 왈츠를 춘다. 두 사람은 말끔한 서양식 정장을 입었다. ‘모던’하다. 박경원과 한지혁의 고뇌는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물론 세상에는 독립운동가거나 친일파거나 두 종류의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떠나서 개인의 꿈도 충분히 소중하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것은 어떤 시대적·사회적 현실은 개인의 꿈을 가로막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꿈만을 쫓을 수 없는 그런 시대와 그런 사회가 있다는 것이다. 조국이나 민족을 떠난 개인이 있을 수 없었던 그런 시대와 그런 사회 말이다.

이 영화에는 적어도 위선은 없다. 그게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이고 그게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박경원은 이 영화에서 한번도 시대적·사회적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조금만 상황을 바꾸면 굳이 1925년에서 1935년 무렵이 아니라 그 어느 때, 그 어느 나라에서도 가능한 이야기다. 오히려 1925년에서 1935년 무렵 일본에서 살았던 조선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박경원을 굳이 변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국내 최초의 여성 비행기 조종사 이야기를 예쁘게 그려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한지혁은 “조국이 네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 묻고 박경원은 그런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한지혁의 질문은 관객들에게도 던져진다. 그 순간 관객들도 선뜻 그 질문을 부정하지 못한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이제는 1935년만큼 큰 울림을 갖지 못한다. 현실의 지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교묘하게 1935년과 2006년의 현실을 뒤섞고 2006년의 관점으로 박경원과 한지혁을 평가하도록 만든다.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언짢고 불편한 이유다.

(이 영화는 시대와 무관하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 시대와 무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박경원에게 왜 애국지사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엉뚱한 일이죠. 이야기의 맥락과도 어긋나고요. 왈츠를 출 수도 있고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1930년 무렵입니다. 박경원에게 시대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아무런 고뇌도 부끄러움도 없었다는 것이 저는 이상합니다.)

(이 영화는 굳이 박경원을 변명하려 들지 않았고 분명히 그게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박경원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부분을 일부러 건너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1930년인데 1930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조국이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는데”라는 질문은 박경원이 해야하지만 박경원은 하지 않습니다. 말끔하게 지워져 있는 것이죠. 굳이 박경원을 미화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박경원은 영웅신화에 흠집을 낼만한 주제들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아요. 한지혁의 친구조차도 박경원이나 한지혁을 드러내놓고 비난하지 않아요. 이런 서술방식은 비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 비행기 조종사의 입지전적 성공 이야기가 돼 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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