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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펀딩에 실패했다.”

Written by leejeonghwan

May 7, 2001

세계 시장 진출 좌절한 디쓰리씨 서주영 사장 이야기.

“어떻게 되든 다음 주에는 귀국할 겁니다. 돌아가서 뵙죠.” 은근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던 그는 몇일 사이에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고 있었던 벤처캐피털 크레센도벤처스 crescendoventures.com가 결국 투자를 보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보였다. “정말 미국 벤처캐피털들 사람 애간장 녹이는 건 알아줘야 합니다.” 실리콘밸리 생활 14개월을 접는 디쓰리시 www.d3c.co.kr 서주영 사장의 소감이다.

디쓰리시는 유선 인터넷과 무선 인터넷 사이에 콘텐츠를 자유롭게 변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인터넷 웹사이트에 오른 콘텐츠를 휴대전화나 개인휴대단말기(PDA)는 물론이고 앞으로 나타날 온갖 종류의 무선 인터넷 기기에 바로 뿌려줄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똑같은 내용의 콘텐츠를 하드웨어에 맞춰 따로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시스템 구축비용이 50% 이상 줄어들게 된다. 서 사장은 무선 인터넷이 활성화할수록 이런 통합 시스템의 필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2003년에 분기 흑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한해 매출이 3천만달러를 넘어설 겁니다.” 그때만 해도 디쓰리시의 사업계획은 언뜻 완벽해 보였다.

계획대로라면 하루라도 빨리 개발을 마무리짓고 늦어도 올해 10월부터는 영업에 들어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년 3월 무렵에는 서비스를 시작해야 한다. 서 사장이 미국으로 눈을 돌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선 1차로 500만달러를 투자 받을 계획이었죠. 대기업들과 맞먹으려면 그만큼 몸집을 키울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일찌감치 미국에서 개발을 시작하고 미국 벤처캐피털을 찾아가 문을 두드린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 사장의 실리콘밸리 생활 14개월을 돌아 보자.

500만달러를 만들어 오겠다고 용감하게 미국에 건너간 서 사장은 막막하기만 했다. 닥치는 대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서 사장은 브이시써치닷컴 www.vcsearch.com을 통해 200달러짜리 벤처캐피털리스트 인명록을 구입했다. 변호사를 잘 골라야 한다는 충고도 새겨들었다. 유능한 변호사 덕택에 알음알음으로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을 소개 받는 일도 많았다. 그 가운데 무선인터넷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29개 벤처캐피털을 골라 e메일로 간단한 회사 소개 자료를 보냈다. 필요 이상으로 두꺼운 사업계획서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벤처캐피털 리스트들은 날마다 비슷비슷한 e메일을 수백통씩 받는다. 관심을 끌려면 짧은 몇마디에 회사의 모든 것을 담아내야 했다. “빠른 속도로 유선과 무선이 통합되는 추세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콘텐츠를 따로따로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모두 하나의 시스템 아래 묶이게 될 겁니다. 우리는 4년전부터 이 시스템을 준비해왔습니다. 필요하시면 사업계획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업계획서를 만드는데만 8개월이 걸렸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으면서 서 사장은 벤처캐피털 리스트들이 모이는 자리면 빠지지 않고 끼어들었다. 때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가쁘게 사업 계획을 소개하기도 했다. “30초안에 관심을 끌어내야 하죠. 그게 먹혀들어야 겨우 사업계획서를 보여 줄 기회를 갖게 됩니다. 관심을 끌지 못하면 거기서 끝이죠.”

미국 벤처캐피털 은 역시 듣던대로 까다로웠다. 500만달러를 투자하기 위해 100만달러를 쓴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이들은 한국 상공회의소에 디쓰리시의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디쓰리시 한국 본사에 사람을 보내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툭하면 수십개의 까다로운 설문을 들고 와서 서 사장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분명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렸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과연 그만큼 기술력이 뒷받침될까 벤처캐피털들은 확신하지 못했다. 28개 벤처캐피털 가운데 12군데에서 관심을 보였고 두군데와는 막바지 가격협상 단계까지 들어갔다.

그리고는 피를 말리는 초조한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후발업체들은 바짝 뒤따라오는데 서 사장은 매일 같이 전화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4개월이 훌쩍 지나갔고 서 사장은 지난달 15일 결국 투자를 보류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마케팅 능력을 보완할 때까지 투자를 늦추겠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상 투자를 못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었다.

디쓰리시의 장밋빛 전망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미국 벤처캐피털 돈을 받고 당당하게 세계 시장에서 승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글쎄요. 여유자금을 충분히 준비했더라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좀 더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좀 더 그럴듯하게 회사를 포장할 수 있었겠죠.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지만요.”

서 사장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보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털을 대상으로 조금이라도 자금을 끌어들이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면 국내 벤처캐피털이 따라줄 것이라고 서 사장은 믿고 있다. 그렇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 다시 한번 미국 벤처캐피털 을 두드려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의치 않다면 아예 인수합병 당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고객이 될 IBM이나 오라클, 노키아, 퀄컴 등이 눈독을 들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헐값에 팔아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다면 아예 사장시킬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투자를 받기에도 인수합병을 당하기에도 너무 이르다. 벌써 20억원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제품을 실용화하기까지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안정적으로 매출이 일어나려면 앞으로도 50억원 이상을 더 쏟아부어야 한다. 서 사장도 인정하듯이 디쓰리시는 처음부터 너무 크게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시장을 정확히 내다보기는 했지만 사실 대기업도 쉽사리 감당하기 힘든 사업계획이었다.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어가면서 제휴를 맺고 그들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가면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야하는 사업이다. 그 가운데 만만치 않은 다국적 기업들과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 한다. 직원이 30명도 안되는 벤처기업이 이런 엄청난 사업을 벌일 수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디쓰리시의 거창한 사업계획이 갖는 한계일 수도 있고 넓게 보면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한계일 수도 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니 힘든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틈새시장만 파고들어야 한다는 이야깁니까. 우리도 세계 시장에 나가 기술력으로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죠.” 서 사장의 항변은 지극히 옳다. 그렇지만 그가 직접 경험했듯이 세계시장 진출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아이디어와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도 절감하지 않았던가.

이정환 기자 jlee@dot21.co.kr

디쓰리시의 교훈.

물론 “한국 벤처기업들은 틈새시장만 노려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다만 한국 벤처기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가 틈새시장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직접 원천기술을 개발하거나 세계 시장을 상대로 마케팅을 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다.

먼저 사업계획이 너무 거창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500만달러를 선뜻 투자하기에 구성원들의 기술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하지 않았을까.

우리기술투자 김정민 팀장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앞으로 나스닥에 올라갈 계획이라면 현지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경영진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벤처캐피털 리스트들은 사업계획서 앞장을 들춰보고 유명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본다고 하지 않은가. 비슷한 사업계획으로 회사를 하나 상장시킨 경험이 있거나 누가 봐도 이 분야 최고 권위자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 CEO와 경험을 갖춘 기술진을 영입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주기술투자 최용진 팀장은 “투자 유치에 걸리는 시간을 꼼꼼히 따져봤어야 했다”고 충고한다. 이야기가 잘 풀리면 두달 만에 투자를 받을 수도 있지만 오래 걸리면 1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후발업체들 움직임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투자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디쓰리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급히 수혈을 받는다지만 그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을 까먹은 뒤가 될 것이다.

서주영 사장도 지적하고 있듯이 디쓰리시는 벤처캐피털을 만나기 전에 회사의 틀을 어느정도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자부심도 결국 불필요한 편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아직까지 미국 현지에서 미국 벤처캐피털 에게 투자를 받은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디쓰리시의 실패는 여러가지를 가르쳐준다. 디쓰리시는 한발 앞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냈고 완벽에 가까운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치밀한 시장 조사와 사업 전망, 위험요인 분석 등은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벤처캐피털은 디쓰리시를 외면했다. 다만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허점이 드러났고 자칫 모든 사업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위기에 놓여있다. 디쓰리시의 다음 전략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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