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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후분양제 도입해라.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28, 2005

몇주 전 일이지만, 송년호 기획으로 부동산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했다. 끝나고 모여서 저녁을 먹는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김헌동 본부장을 그때 처음 봤다. 무슨 본부장이냐면 자그마치 아파트값 거품빼기 운동본부다. 그날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후분양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물건을 살 때는 돈을 주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물건을 넘겨받는다. 그런데 아파트를 살 때는 돈을 미리 다 내고 2년 반 뒤에 물건을 받는다. 파는 쪽 입장에서 보면 물건 값을 받고 난 다음 그때부터 물건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돈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에 굳이 잘 만들려고 애쓸 이유도 없다. 이왕이면 더 싼 자재를 집어 넣을수록 이익이 많이 남게 된다. 철근 한줄, 콘크리트 한줌이라도 덜 집어넣으면 그만큼 고스란히 이익이 된다. 결국 입주자들만 봉이 된다. 이런 바보 짓이 어디에 있나.

후분양제는 아파트를 다 짓고 난 다음에 팔라는 이야기다. 미리 돈부터 받지 말고 제대로 지어놓고 난 다음에 가격을 매기라는 이야기다. 좋은 자재를 썼으면 그만큼 비싸게 받으면 되고 싸구려 자재를 썼으면 그만큼 싸게 받으면 된다. 소비자들은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를 수 있게 된다. 햇볕은 잘 드는지, 실제로 아늑한 느낌인지, 튼튼하게 잘 지어졌는지, 거실과 주방의 크기는 적당한지 등등.

어떻게 수억원짜리 물건을 보지도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정말 상식의 문제다.

지금은 건설회사들마다 분양광고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다. 모델하우스도 삐까번쩍하게 짓는다. 분양비용은 고스란히 아파트 값에 포함된다. 그런데 일단 분양이 끝나고 중도금에 잔금까지 다 내고 나면 그때부터 입주자들은 꼼짝없이 봉이 된다. 정작 아파트는 대충 짓게 된다.

후분양제가 의무화되면 건설회사들은 신문마다 분양광고를 도배할 이유가 없다. 모델하우스를 지을 이유도 없다. 다 짓고 난 다음에 물건을 내놓고 제값 받고 팔면 되는데 뭐하러 짓기도 전에 광고를 내겠나. 짓기도 전에 돈을 땡기려니까 엄청나게 광고를 내야 하는 거다. 그래서 과장광고를 하고 속기도 하는 거다.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그때부터는 잘 짓기 경쟁이 시작된다. 지금은 잘 짓기 경쟁이 아니라 더 많이 광고하기 경쟁이다. 돈 땡기기 경쟁이다. TV와 온갖 신문에 쏟아져 나오는 분양광고를 봐라.

김 본부장은 대통령 조치로 어느날 갑자기 예고없이 후분양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내일부터 모든 아파트를 후분양제로 지어야 한다고 조치를 내리라는 이야기다. 과거 금융실명제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분양이 끝났거나 진행중인 아파트는 그대로 짓되 앞으로 짓게 될 아파트는 다 짓고 난 뒤에 돈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동안 신규 아파트 건설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공급에 영향을 미치는 건 2년반 뒤다. 건설회사들 입장에서는 2년반 동안 내내 장사를 안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결국 후분양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입주 예정자들이 2년반씩 돈을 묻어둬야 하지만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시공회사나 건설회사가 직접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다 짓고 난 다음에 안 팔리는 아파트는 그만큼 가격이 떨어질 테니 소비자들에게는 좋다. 건설회사는 그만큼 부담을 지게 된다. 잘 팔리게 만들어야 하고 그만큼 소비자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후분양제는 아파트 값을 잡는 것과 별개로 우선적으로 도입돼야 할 과제다. 물건부터 보고 돈을 내겠다는, 이건 정말 상식의 문제다.

토지공개념 등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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