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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밥꽃양’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23, 2005

(수정해야할 부분에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고쳐쓰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영화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루했고 그래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때 나는 카메라의 시선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을 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의 남성 노동자들은 못 생기고 거칠고 비열했다. 혐오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얄팍하고 비루한 현실을 이 영화는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3년 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이 해묵은 영화에 열광하는지도 알게 됐다. 처음 보았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나중에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나는 이 영화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영화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때는 1998년 여름이다. 국회에서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파견법이 제정됐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를 탈퇴하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 영화는 그해 여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IMF 외환위기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해 4월과 5월, 3500명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들은 퇴직금과 함께 4~6개월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회사측은 2200억원의 임금삭감과 8189명의 추가 감원을 노조에 요구해 왔다. 노조는 3차 희망퇴직을 받아들였고 추가로 2천명이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달 뒤 회사측은 결국 4830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노동부에 접수시킨다. 동시에 4차 희망퇴직 신청이 시작됐고 3천명이 회사를 더 떠났다. 무기한 전면 파업과 임시 휴업에 들어간 것은 7월 20일이다. 불안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회사측은 7월 31일 1538명에 대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공장의 기계들은 멈춰서 있고 공장 밖에는 전경들이 쫙 깔려있다. 금방이라도 공권력이 투입될 분위기다.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노조 집행부가 잡혀 들어가고 나면 그나마 믿었던 노조마저 무너진다. 엄청난 손배 가압류를 두들겨 맞고 정리해고는 정리해고대로 진행된다. 그때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현대자동차 노조 집행부는 타협을 선택했다. 정리해고를 일단 받아들이되, 인원을 최소화하자는 것이었다. 정부가 중재에 나섰고 그래서 나온 대안이 277명의 식당 아줌마들을 해고하고 그 아줌마들을 다시 노조가 고용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무도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 공권력 투입도 없었고 손배 가압류도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잡혀가지도 않았다. 공장은 다시 가동됐고 다들 다시 일을 시작했다.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이 아줌마들은 이제 현대자동차 직원이 아니라 노조 직영식당의 직원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이제는 노조에서 월급을 받는다. 이게 의미하는 게 뭘까.

나는 이 영화가 울산영화제에서 사전검열 논란으로 화제에 오르던 무렵,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쓴 적 있다. 누군가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고 노조는 식당에서 밥 짓는 아줌마들을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그때 나는 약자가 더 약한 약자를 짓밟았다고 썼다. 그리고 그 뒤 우여곡절 끝에 일반에게 공개된 이 영화를 보았고 그 이상의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취재하면서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이 영화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가를 그때서야 깨닫게 됐다. 우리는 이 영화의 뒷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 현대자동차는 277명의 식당 아줌마들을 해고하기로 했는데 파업이 끝난 뒤 자진 퇴직한 133명을 빼고 144명만 노조 식당에 고용됐다. 노조는 추가로 직원을 고용하지 않았고 277명이 하던 일을 144명이 하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부터다. 회사측은 277명이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 133명의 남성 노동자들을 추가로 해고한다. 노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해 현대자동차에서는 하청 노동자 1800명과 희망퇴직 8천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261명 등 모두 1만2천명이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된다.

여성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내몰았지만 그 타협이 결국 전체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게 된 셈이다. 정리해고는 그해 여름부터 전국으로 확산됐다. 다른 회사들 노조들도 잇따라 맥없이 무너졌다. 국내 최대의 강성 노조를 자랑하던 현대자동차의 몰락은 그 신호탄이었다.

정리해고를 위협으로 명예퇴직을 강요하고 멀쩡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내모는 회사들도 늘어났다. 법은 이미 통과됐고 노동자들은 저항했지만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때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충분히 싸우지 못했다. 그들은 불의를 묵과하고 그 대가로 생존을 구걸했다. 그들은 시스템과 싸우기 보다는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는 비겁한 타협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영화에서 한 노동자가 말한다. “장비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불을 지르자. 그래도 안 통하면 프레스를 망가뜨리면 된다. 프레스가 망가지면 적어도 1년 이상 공장을 돌릴 수 없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그날로 문을 닫는다.” 그는 “자본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자본과 노동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는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식당 아줌마들도 말한다. “공권력 하나도 겁 안 난다. 들어오라 캐라.” 그 옆의 다른 아줌마도 말한다. “우리 밥줄 끊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뭐가 있노.” 노조 집행부가 투쟁을 포기하고 타협을 선택했을 때 이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인다. “정리해고 받아들일라카먼 뭐하러 한달 넘게 이 고생을 했노. 이게 무슨 지랄이고.”

붉은 머리띠를 둘러맨 한 노동자는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이 나는 너무 두렵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그때 현대자동차 노조는 “아줌마들만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277명의 아줌마들만 정리해고되면 나머지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가 생존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때 식당 아줌마들의 정리해고는 소수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희생의 제도화를 불러왔다. 노조는 미끼를 물었고 자본의 술수에 말려들었다.

277명의 아줌마들에게 희생을 전가하고 그 대가로 평화를 얻었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아줌마들을 버렸을 때 노조는 이미 분열됐고 스스로를 지킬 힘과 명분을 동시에 잃었다. 아줌마들은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노조를 상대로 단식 투쟁을 했고 노조는 이를 무시했다. 아줌마들은 울부짖는다. “이렇게는 못 산다. 억울해서 못 산다.”

이 아줌마들의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줌마들의 문제인줄 알았던 것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됐다. 이 영화는 1998년 그 참혹한 기억을 불러와 2006년 오늘,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그 깨달음은 정말 섬뜩하고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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