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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꽃양’, 19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록.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22, 2001

당신이 노동조합의 대표자고 어쩔 수 없이 누군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 노조는 277명의 식당 아줌마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웠다. 노조는 물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노조는 식당 아줌마들의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회사로부터 식당을 인수해 아줌마들을 다시 고용했다. 식당 아줌마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이제는 노조에서 월급을 받게 됐다. 언뜻 생각하면 아무도 일자리를 잃지 않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식당 아줌마들은 억울했을 것이다. 왜 하필 우리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나. 우리가 여자라서? 밥짓는 아줌마라서?

‘밥꽃양’은 현대자동차 식당 아줌마들의 복직 투쟁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투쟁을 이 아줌마들은 3년 가까이 계속해왔다. 단식 투쟁으로 쓰러져 실려 갈 때까지도 회사와 노조는 식당 아줌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같이 정리해고됐던 남성 노동자들이 모두 복직되고 난 뒤에도 식당 아줌마들은 여전히 하청 노동자로 남아 있다.

혹시나 노조가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가 상영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원래 울산영화제에서 상영되기로 했다가 사전 검열 논란을 빚으면서 문제가 커진 것도 그 때문이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인터넷을 통해 영화는 공개됐고 노동운동 뒤편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현실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됐다.

이 영화에서 노조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비춰지고 있다. 왜 약자가 더 약한 약자를 짓밟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의 노동운동이 정규직과 남성과 한국인 노동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과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는 누가 지키는가. 과연 노조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일까.

돌아보면 정리해고 바람이 호되게 몰아쳤던 1998년, 신기하게도 실업률은 오히려 낮아졌다. 그해 7월 고용동향을 살펴보면 남성 취업자는 67만여명(-5.3%), 여성 취업자는 72만여명(-8.2%)이 줄어들었다. 여성의 실직률이 남성을 훨씬 웃돈 것이다. 또한 경제활동인구를 놓고보면 남성은 1.2% 늘어난 반면 여성은 4.0% 줄어들었다. 일자리를 잃은 여성 노동자들이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머무르면서 실업률이 낮아진 것이다. 정부가 여성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정리해고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998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직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는다. 아직도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남성 노동자들로 대체되고 있다. 대부분 구조 조정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숫자 채우기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질문. 노조는 과연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까. 유럽에서 조심스럽게 도입되고 있는 일자리 나누기를 시도해 볼 수는 없었을까. 아마도 노조는 자신의 월급이 깎이기 보다는 누군가가 자기 대신 회사를 떠나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영화 ‘밥꽃양’은 약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하고 냉정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뒤늦은 반성이지만 한번쯤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영화 ‘밥꽃양’은 진보네트워크 larnet.jinbo.net에서 볼 수 있다.

이정환 기자 jlee@dot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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