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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실패’.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17, 2004

놀랍게도 이 책은 실화다.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줄여서 LTCM).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 회사였던 LTCM의 성장과 몰락에 대한 이야기다. LTCM은 1990년대, 1000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 세계를 넘나들면서 온갖 파생상품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해마다 40% 이상 수익을 냈다.

파생상품은 위험이 큰만큼 기대수익도 크다. 그게 이른바 레버리지, 지렛대 효과다. LTCM은 1000억 달러로 1조 달러가 넘는 돈을 움직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세계 최고의 금융전문가들이 달려들어 과학과 이론을 만들었고 이론은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왔다. 그 LTCM이 1998년 문을 닫았다. 세계를 금융위기로 몰아넣었던 최악의 위기 상황이었다.

1조 달러가 넘는 돈을 움직이는데도 LTCM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저 로웬스타인이 에릭 로센펠드를 비롯해 여러 LTCM의 핵심 펀드매니저를 인터뷰하고 이 책을 기록하면서 비로소 LTCM의 숨겨진 역사가 알려졌다. 미국 금융시스템의 추악한 뒷모습도 함께 드러났다.

LTCM은 위험없이 돈을 버는 이른바 무위험 차익거래 기법을 시도했다. 선물은 금리와 만기에 영향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현물 가격에 연동한다. 선물이 현물보다 고평가돼 있다면, 비싼 선물을 팔고 싼 현물을 사면 된다. 거꾸로 선물이 현물보다 싸다면 싼 선물을 사고 비싼 현물을 팔면 된다. 선물은 물론이고 현물도 공매가 가능하다. 현물을 들고 있지 않아도 일단 팔고 가격이 떨어지면 나중에 사서 갚아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기가 정해져 있으니까 결국 선물과 현물의 가격은 같아질 수밖에 없다. 만기까지 들고갈 수만 있으면 선물과 현물의 차이만큼 이익이 난다.

21. “존 메리웨더에게 한가지 믿음이 있다면 손실은 이윤이 될 때까지 그냥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선물과 현물의 가격차이를 스프레드라고 한다. 효율적인 시장은 변동성이 적고 위험이 줄어든다. 스프레드도 결국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번달에는 손실이 날 수 있지만 다음달에는 결국 스프레드가 줄어들고 손실의 만회는 물론이고 이익이 난다. 선물뿐만 아니라 채권이나 외환에도 이런 스프레드가 나타난다. 이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파생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이 블랙숄스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스프레드를 노린 차익 거래는 안정적인만큼 수익률이 별볼일 없는 경우가 많지만 차입거래와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면 투자금액 대비 이익을 크게 부풀릴 수 있다. LTCM은 기가 막히게도 선물이나 현물을 사면서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다시 돈을 빌려왔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를 리포 파이낸싱(repo financing), 환매계약금융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돈을 거의 들이지 않으면서 이익만 챙기는 금융기법인 셈이다. LTCM의 차입비율은 55배까지 불어났다.

80. “LTCM은 20억 달러짜리 거래를 하면서 제 주머니에서는 동전 한 푼도 꺼내지 않았다.”

이런 엄청난 거래가 가능했던 건, LTCM이 로버트 머턴과 마이런 숄스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경제학 교수들이 그들의 완벽한 이론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펀드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LTCM은 슈퍼 컴퓨터를 활용해 엄청난 계산을 했고 실제로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은행들은 LTCM에 돈을 맡기지 못해 안달했고 앞다투어 파격적인 조건으로 LTCM에 돈을 빌려줬다.

83. “LTCM은 무도회에 데뷔하는 여성과 같이 매혹적인 자태를 뽐냈고 모든 은행들은 함께 춤추기를 원했다.”

351. “은행들은 LTCM의 성과에 감탄했고 이들의 실적과 학위와 명성에 현혹돼 있었다.”

53. “헤지펀드에 투자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상류층이며 월스트리트의 똑똑한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세상이 온통 투자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한 옆에 비켜서서 나의 자산을 신중하고 예리하게 그리고 소담스럽게 부풀려주는 젊고 박식한 헤지펀드 매니저의 이름을 가만히 언급하는 일보다 더 스릴 넘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슈퍼컴퓨터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중남미까지 세계의 모든 시장을 넘나들면서 스프레드를 찾아냈고 LTCM은 기회를 놓칠새라 엄청난 금액을 쏟아부어 재빨리 이익을 챙기고 빠져 나왔다.

문제는 1998년 8월에 터졌다. LTCM의 믿음과 달리 가끔 스프레드는 좁혀들지 않는 수도 있다. 너무 벌어져서 이제는 좁혀들 수밖에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경우에도 그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모라토리엄, 지불 유예를 선언한 러시아의 경우가 그랬다. 러시아에 엄청난 모험을 걸고 있었던 LTCM은 치명적인 손실를 봤다.

최악의 경우에도 하루에 3500만 달러 이상 잃지 않는다던 LTCM의 화려한 수학 모델은 엉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1998년 8월21일 LTCM은 5억5500만 달러를 잃었다. 존 메리웨더 LTCM 회장은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스프레드는 항상 돌아온다”고 주장했으나 갈수록 스프레드는 벌어졌고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 달 동안 LTCM은 19억 달러를 잃었다. 펀드의 자산은 1250억달러에서 2% 수준인 22억8천만 달러로 줄었다.

스프레드가 벌어져 손실이 늘어나면 거래를 청산하고 손실을 확정짓거나 자금을 더 집어넣어 증거금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1조 달러가 넘는 거래를 하면서도 정작 LTCM은 현금을 거의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지불불능의 상황이었다. LTCM의 신화는 끝났다.

1조 달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1200조 원, 우리나라 정부예산 118조3600억 원의 10배, 국내총생산 4766억 달러의 두배가 넘는 규모다.

LTCM은 시장의 극단을 무시했다. 투자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포지션을 되사줄 거래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둬야 한다.

189. “시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오랫동안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272. “금융은 가끔 한편의 시만큼 공정하다. 무모함을 적절한 열정으로 응징한다.”

219. “문제는 LTCM의 재앙이 단순히 하나의 고립된 사건, 즉 자연이란 항아리에서 어쩌다가 뽑힌 나쁜 패였는가, 아니면 시장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리스크를 동시에 헤지할 수 있다고 하는 블랙숄스 공식 자체가 불어넣은 허상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인가 하는 것입니다.” / 머턴 밀러.

LTCM의 결말은 참담했다. LTCM이 무너지면 1조 달러의 부실도 함께 터져 나올 상황이었다. 결국 그해 9월21일 연방준비은행은 14개 은행을 내세워 36억5천만 달러를 LTCM에 지원했다. 앨런 그린스펀은 다음날 금리를 파격적으로 0.5%포인트나 인하했다.

LTCM의 똑똑한 펀드매니저들은 1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한 재앙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36억5천만 달러를 지원받은 뒤에도 그들의 모델은 수익을 내지 못했다. 스프레드는 줄어들지 않았고 LTCM은 2000년에 최종 해산된다.

LTCM의 문제는 과연 유동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과 전략의 문제였을까. 확실한건 아무리 완벽한 이론과 전략도 시장의 변동성을 모두 떠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속도가 빠를수록 위험하다는건 자연의 법칙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LTCM 사태를 진화한 것은 앨런 그린스펀의 빠른 판단력과 결단이었다. 은행들은 연방준비은행의 협박에 굴복해 울며겨자먹기로 LTCM에 돈을 댔지만, 그 덕분에 손실을 크게 줄였고 미국은 엄청난 금융대란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LTCM의 성장과 몰락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추악한 머니게임의 한 단면이다. 노암 촘스키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금융자본은 하루 1조~3조달러 규모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수출과 수입 등 실물 경제와 관련된 부분은 5% 수준, 나머지는 모두 선물과 채권, 외환 시장을 넘나드는 투기자본이다. 얼마든지 나라 하나쯤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규모다. LTCM은 무너졌지만 약탈은 계속된다.

최근 LG카드 문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미국의 LTCM 사태를 거론하면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LTCM은 LG카드와 달리 적어도 모럴 해저드, 도덕적 해이는 없었다. LTCM은 과학의 실패였고 과학적 해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LG카드는 다르다.

작년 봄에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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