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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비정규직법안, 해법은 없을까.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17, 2005

올 들어 가장 추웠다는 12월 13일 오후,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운 날씨에 서울역 대합실에서는 KTX 여승무원들의 집회가 한창이었다. KTX 여승무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은 한국철도유통이라는 회사의 계약직 직원이다. 일은 철도공사에서 하지만 월급은 철도유통에서 받는다는 이야기다.

철도유통은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데 이들 가운데 몇몇은 내년에 재계약이 안 됐다. 재계약이 안 되면 자연스럽게 해고가 된다. 해고의 이유도 없고 별다른 통보조차 없다. 재계약을 하겠다는 전자우편을 받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무려 1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꿈의 열차 KTX의 여승무원이 된 그들은 이렇게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임금 구조다. 철도공사는 도급계약비로 한 사람 앞에 248만5천원을 지급한다. 철도유통은 그 돈을 받아 30%를 관리비로 떼고 나머지를 주도록 돼 있다. 174만원 정도를 받게 되는 셈인데 실제로 이들이 받는 돈은 130만원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174만원은 연월차 수당에 휴일근무 수당까지 포함된 것이다. 만약 연차나 월차를 쓰거나 휴일에 근무를 안 하게 되면 그만큼 월급이 줄어든다. 그 나머지는 모두 철도유통의 몫이 된다. 올해 들어온 신입들은 그나마 거기서 월급이 13만원씩 더 깎였다. 지난해 들어온 선배들과 차등을 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선배들 월급을 올려주는 게 아니라 후배들 월급을 깎고 그 나머지는 역시 철도유통이 챙겼다.

KTX에는 기관사를 빼고 4명의 승무원이 탄다. 차장이 한명 있고 여승무원이 셋이다. 그런데 기관사와 남자 팀장은 모두 철도공사의 정규직 직원이다. 여승무원들만 비정규직이다. 처음에 철도유통은 계약직이기는 하지만 준공무원 수준의 처우와 정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조합 간부들이 이번 재계약에서 전원 탈락한 것이다.

승무지부 민세원 지부장은 “여성부에 찾아갔더니 노동부에 가서 알아보라더라. 그런데 정작 노동부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올해 2월 노동위원회에 불법파견 판정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기각됐다. 보통은 25일 안에 결과를 통보하도록 돼 있는데 7개월이나 걸려서 나온 결과가 불법파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절반 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평생 계약직으로 살라는 거죠. 1년마다 계약서를 다시 쓰면서, 그것도 언제 잘릴지 모르면서 말이죠.”

코오롱의 경우는 더 어처구니가 없다. 코오롱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실시된 희망퇴직으로 전체 직원 3083명 가운데 864명을 내보낸 바 있다. 정리해고를 포함, 올해 6월 기준으로 코오롱의 직원 수는 2043명까지 줄어들었다. 반년 사이에 직원이 3분의 2로 줄어든 셈이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그렇게 정리된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같은 공장의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들은 오전에 희망퇴직 신청서에 서명하고 퇴직했다가 오후부터는 하청업체의 직원으로 출근했다. 이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임금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회사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고 한다. “정리해고를 당할래, 자진해서 희망퇴직을 할래. 희망퇴직을 하면 위로금도 주고 하청업체에 취업도 시켜주겠다. 그러나 버티다가 정리해고를 당하면 아무것도 없다. 선택을 해라.”

직원들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는 걸 회사도 시인했다. 회사는 이 과정을 ‘정규직의 비정규직 전환’이라고 부르지 않고 ‘공정 분할’과 ‘아웃소싱’이라고 부른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소속 회사는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다. 조재현 인력관리팀장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전문성과 숙련도가 낮은 공정을 따로 떼어 내 하청업체로 아웃소싱하는 겁니다. 다 같이 죽느냐 몸집을 줄여서 살아남느냐의 문제죠.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코오롱이야 구조조정이 생존의 문제였다고 변명하지만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고 있는 은행들까지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은행은 2002년 4월 공과금 수납업무를 맡을 사무행원 116명을 3개월 단위 계약직으로 채용했다. 채용할 때만 해도 3개월마다 계약서를 쓰면 별도의 심사 없이 희망자를 전원 재계약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러나 2년 뒤인 2004년 3월, 우리은행은 이들을 전원 해고했다.

공과금 수납업무가 없어진 게 아니라 더 싸게 부릴 수 있는 피크타이머들에게 그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피크타이머는 월말 마감무렵 몇일만 출근하는 비정규직을 말한다. 그만큼 월급도 훨씬 줄어든다. 이들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지노위와 중노위에서 모두 승소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고 2006년 1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부당해고라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해고상태다.

이들은 85만~110만원 정도 받고 일했는데 그나마 1년 뒤부터는 10만원이 깎였다. 출산을 하면 퇴직을 종용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금융산업노조 산하 기관의 전체 직원은 14만87명인데 이 가운데 비정규직이 4만366명으로 29.5%나 된다. 이들 가운데 89.9%가 15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고 일한다. 100만원 이하를 받고 일하는 사람도 20.0%에 이른다.

권혜영 금융산업노조 비정규직지부 위원장은 “최근 설문조사 결과 비정규직 여성의 13.9%가 직장내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비정규직의 경우 재계약 여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직장 내 성희롱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되면 이들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논란의 핵심은 사유제한과 고용의제다. 노동계는 비정규직을 쓸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사유제한을 두지 않을 방침이다. 정부의 법안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비정규직을 쓰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고용의제는 일정 기간이 지나거나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 경우 비정규직을 강제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규정이다. 민주노동당 등에서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반대하고 있다.

노동위는 합법이라고 판정했지만 KTX 여승무원들 경우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면 철도공사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굳이 파견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비정규직을 쓸 수 있게 된다. 코오롱이나 우리은행의 경우도 2년이 되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비정규직을 쓸 수 있게 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모든 업종과 모든 업무에 폭넓게 비정규직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데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법안이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구권서 의장은 “비정규직 법안을 만들면서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들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청회도 한번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의견 수렴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도 두 번이나 면담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고 노동부 역시 이들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 정부는 국회에 공을 넘겼고 1년이 넘도록 계류중이다.

비정규연대회의는 원청 사용자의 사용자 책임 인정과 파견법 철폐,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상시고용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번 법안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의석수가 부족한 탓에 거의 힘을 쓰고 있지 못한 상태다. 국회 앞에서는 비정규연대회의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70일 넘도록 천막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동계와 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11월 30일, 한국노총이 열린우리당과 손을 잡으면서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국노총이 돌연 사유제한과 불법파견의 고용의제를 포기하고 정부의 법안을 대폭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갈라서면서 민주노동당도 입장이 애매하게 됐다.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어느 한쪽의 입장만 대변하기는 곤란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을 거세게 비판했고 한국노총은 “현실을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했다. 엉뚱하게도 12월 1일에는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까지 나서서 한국노총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태는 노동계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까지 양분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건설운송노조 박대규 위원장은 “참여연대가 쓸데없는 참여를 했다”고 비난했다.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느냐는 이야기다.

결국 민주노동당도 입장 정리를 했다. 한국노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단병호 의원은 “기간제 고용은 원칙적으로 금지돼야 하고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돼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2년 후 고용의제라는 규정도 빈틈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1년 11개월짜리 계약을 맺고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굳이 정규직 전환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유제한은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단 의원은 “불법파견의 경우 무조건 고용의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용의제 없이 고용의무만 부과한다면 현행 파견법에서 오히려 더 후퇴하는 셈이 된다. 이 경우 불법파견으로 판정을 받더라도 벌금만 내면 된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고용의무를 부과할 게 아니라 자동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의원은 “노동자들은 결국 사용자의 온정이나 노동부의 행정조치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얼마나 무망한 일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했다.

향후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민주노동당을 배제하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해서 정부 법안을 표결처리하는 시나리오, 열린우리당이 사유제한을 수용하되 사유를 크게 늘려서 민주노동당의 동의를 얻는 시나리오. 현재로서는 첫 번째 시나리오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민주노동당에서도 사유를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이라 두 번째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짚고 넘어갈 것은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고 만든 이 법안이 과연 비정규직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느냐다. 이미 지금도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열악한 조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 법안이 이런 상황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최선의 경우 민주노동당의 주장대로 사유제한과 고용의제 등을 추가할 경우 비정규직이 줄어들거나 더 늘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배규식 노동연구원 본부장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산업전반에 걸쳐 직무혁신과 고용구조 합리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숙련도와 전문성에 관계없이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연봉이 계속 늘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자는 비정규직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죠. 10년차 직원 연봉이면 신입 두명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업무 성과가 같다면 굳이 정규직 직원을 쓸 이유가 없는 거죠.”

배 본부장의 이야기는 비숙련 비전문 노동의 경우는 연공서열식의 획일적 연봉제보다는 업무성격에 맞는 합리적인 임금구조가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단순 기능직의 경우 입사 후 3~4년 정도 지나면 물가 상승률만 반영할 뿐 더 이상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이런 시스템이라면 사용자도 굳이 정규직 채용을 꺼릴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직무에 따라 임금 차별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배 본부장은 “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노동부 근로감독관의 80% 이상이 체불업무를 맡고 있다. 체불은 불법이지만 법으로도 체불을 막을 수는 없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얼마든지 규제를 빠져나가고 정작 감독 집행만 어려워지는 경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게 배 본부장의 입장이다.

숱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법안은 결국 힘의 논리와 정치적 판단에 맡겨지게 됐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올해 안에 이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지만 여차하면 그냥 폐기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굳이 재계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무리수를 두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국회 앞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천막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법안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법안에 자신들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번 겨울은 그 어느 겨울보다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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