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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앞섰던 언론 개혁, 정치 의존을 넘어야 한다.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4, 2022

미디어오늘 사설. 2022년 1월 5일.

2008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정연주 KBS 사장을 해임하면서 방송법의 임명권 조항이 논란이 됐던 적 있다. 1999년까지는 대통령이 KBS 사장에 대한 ‘임면권’을 갖고 있었는데 2000년 1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면직 규정을 없애고 ‘임명권’으로 바꾼 것이다.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임명하긴 하지만 외부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공영 방송의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임기를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정 전 사장은 3년 뒤 해임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안타깝게도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공영 방송의 독립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안광한 MBC 사장은 MBC 로비에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를 뽑아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애초에 임명권자에게 알아서 충성할 사람을 꽂아 넣을 수 있다면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은 큰 의미가 없다.

공영 방송 사장 선출에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이 언론 개혁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17년 12월 MBC가 사장 선임 과정에서 시민 평가단 방식을 도입한 적 있지만 이런 시도가 정부의 선의나 결단이 아니라 민주적 거버넌스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KBS나 MBC가 박근혜 정부 시절보다 낫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전히 대통령이 임명한 사장이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16년 12월, 투병 중이던 MBC 이용마 기자를 만나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적폐에 대한 대청소에는 언론에 대한 요구도 담겨 있다”면서 “공영 방송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법적 장치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선거를 앞둔 2017년 5월에는 ‘세계 언론자유의 날’ 메시지로 “언론의 침묵은 국민의 신음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문 대통령의 약속은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선거 공약으로 공영 방송 지배 구조 개선과 규제 체제 개혁, 지역 다양성 강화, 미디어 개혁위원회 설치 등을 내걸었지만 어느 것도 제대로 진행된 게 없다. 그나마 여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가 엄청난 비판과 반발에 부딪혀 국회 통과도 요원한 상태다. 언론 개혁을 ‘징벌적 손해 배상’으로 풀려 했던 철학의 빈곤이 빚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만약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공영 방송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던 제도는 과거로 남겨둬야 한다”고 선언하고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해 국회와 시민사회가 공영 언론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논의해 달라”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언론인들이 2017년 총파업 때의 결기로 공영 언론의 독립과 다양성 확보, 공론장 복원을 위한 새로운 생태계 모델을 제안하고 요구했다면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같은 질문을 들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손석춘 건국대학교 교수는 지난 11월 전국언론노동조합 창립 33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언론 개혁이 특정 정파의 이해 관계 수준에서 제기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면서 “정파에 과도하게 편향된 언론개혁론이 전면에 나서면서 언론 운동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언론 운동에 나선 조직과 개인들이 기존 정치 체제에 함몰돼 가고 있다”는 비판도 뼈를 때린다.

지난 5년, 거슬러 올라가 지난 20여 년의 경험에서 확인했듯이 언론 개혁은 대통령의 선의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정권을 바꾸거나 또는 지키는 걸로 가능한 한 판 승부가 아니다. 집권 여당이 180석을 확보했다고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투쟁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제도로 풀어야 할 문제도 있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면 낡은 관행에 맞서고 기득권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5년 전 이용마 기자가 남긴 질문을 들고 있다. 우리에게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언론의 사명과 공적 책무에 복무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과 시민들의 신뢰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이용마 기자가 살아있다면 문재인 정부와 싸웠을 것이다. 언론 개혁 의제가 제자리에 멈춰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언론인들이 처절하게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고 스스로를 혁신할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개혁의 주체는 언론이고 그 대상도 언론이다. 정치의 책임도 크지만 정치 탓만 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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