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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려 드는 언론, 통하지 않는 시대.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13, 2020

(월간 ‘신문과방송’ 50주년 기념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래 제가 보낸 제목은 이게 아니었는데, 제목을 잘 뽑아주셨군요.)

한국 언론의 추락과 퇴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땅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저널리스트의 책무와 도덕성, 직업 윤리의 문제로 풀기에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신뢰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반복되는 조사 결과도 있었고,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과 비교해서 신뢰 변화를 물었더니 언론은 45%가 줄었다는 설문 결과도 있었다.

우리는 언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공허한 구호를 남발하거나 언론 전반에 냉소와 불신을 부추기고 최소한의 건강한 토론마저 무력화시키는 일련의 사건을 경험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뉴스를 ‘가짜 뉴스’라고 부르고 “언론은 다 썩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의존할 것은 페이스북 친구들의 타임라인이나 커뮤니티 사이트의 베스트 게시물, 카카오톡을 타고 흘러다니는 ‘(받은 글)’ 찌라시 뿐이라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언론을 개혁하자는 말이 정의를 구현하자는 말만큼이나 울림이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언론 보도에 징벌적 손해 배상을 도입하거나 정정 보도를 원래 기사와 같은 크기로 내도록 의무화하거나 검찰 기자실을 폐쇄하거나 아예 출입처 제도를 없애는 등의 방안이 거론되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낙하산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언론 자유를 외치던 게 겨우 3년 전인데, 세상이 바뀐 뒤에도 언론은 왜 이 모양인가.

100개의 똑같은 기사.

이건 정말 서글픈 이야기다. 언론이 바뀌지 않는 건 바뀌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없어도, 신뢰가 추락해도, 영향력을 잃어도, 아직 광고 시장이 살아있고 협찬과 후원 시장이 받쳐주고 있고 신문 시장의 파이가 그럭저럭 남아있다. 지상파 방송사는 수천억 원씩 적자가 나도 당장 문 닫지는 않을 것이고 신문사들은 여전히 기업들이 먹여 살리고 있다. 애초에 광고 효과를 보고 주는 광고나 협찬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사 종사자들도 딱히 위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도 부장은 이렇게 묻는다. “여기 이거, 우리는 왜 없어?” 비슷비슷한 기사가 이미 100개나 있는데 거기에 기사 하나를 더 얹느라 숙련된 고급 인력들이 하루 종일 출입처 기자실에 앉아서 보도자료를 받아쓰고 다른 언론사 기사를 베껴 쓴다. 물 먹지 않기 위해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 말씀만 해주세요.”

안타까운 건 이 기자들이 저널리스트로서 열정이나 사명감이 없어서 그렇게 지루하고 뻔한 기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이슈를 다 다루는 것 같지만 정작 어떤 이슈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종합 일간지의 함정. 남들 다 쓰는 중요한 이슈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이미 뉴스로서 가치가 사라진 묵은 이슈를 끌어안고 뒷북을 치게 만든다. 유효 기간이 서너 시간도 채 안 되는 기사에 대부분의 기자들이 매달려 있는 게 현실이다.

언론사들이 100개의 똑같은 기사를 쏟아는 것은 그 100개의 기사에 묻어 가야 그나마 읽히기 때문이다. 독자 없는 언론의 시대, 대부분의 언론이 선택한 전략은 그나마 대형 이슈에 묻어가면서 중요한 이슈를 전달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그 똑같은 100개의 기사 때문에 오히려 독자들이 뉴스에 흥미를 잃고 언론에 신뢰를 잃는다는 데 있다. 전략의 부재와 안일하고 나태한 습관과 관행이 만든 초라한 현실이다.

“광고 중독을 벗어나야 저널리즘이 산다”고 말하곤 하지만 언론계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을 만든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누가 뉴스에 돈을 내겠어?” “네이버에 공짜 뉴스가 넘쳐나는데?” 진짜 문제는 자본과의 타협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정작 독자들의 외면과 냉소에 아무런 위기 의식을 갖지 않는 둔감함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 기자들이 날마다 비슷비슷한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불편한 진실은 언론의 신뢰가 갑자기 추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멀쩡했던 기자들이 갑자기 ‘기레기’로 변신해서 저널리즘 윤리와 책무를 망각한 게 아니다. 따옴표 저널리즘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제목 낚시와 선정성 역시 큰 문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포털 탓을 할 일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뉴스 콘텐츠의 경쟁력을 돌아봐야 할 때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도 됐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언론사를 돌아보면 빛나는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언론인은 애초에 박수 받는 직업이 아니다. 뉴스의 가치와 범주, 소비 환경이 달라졌는데, 높아진 기대 수준을 언론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 될 것이다. 언론은 최고의 도덕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이고 언제나 비판의 칼을 휘두르지만 자신들에 대한 비판 역시 감수해야 한다.

사실의 나열이 진실이 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박근혜 정권 말기, 청와대 상춘재 회동에서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박근혜와 환담하던 기자들의 모습이 충격으로 남아있다. 애초에 스마트폰과 노트북 기록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마련한 자리였지만 기자들을 병풍처럼 들러리로 내세웠다는 비판이 많았다. 박근혜 때 그렇게 두 손 곱게 모으고 공손하게 듣기만 하던 기자들이 정권이 바뀌고 나니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비판은 오해와 진실을 동시에 담고 있다.

수천만 국민들이 광장에 쏟아져 나와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민주적인 정부가 출범했다. 그 과정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언론의 탐사 보도가 변화를 촉발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다. 광장의 시간을 지나면서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자리 잡았지만 오히려 언론의 신뢰는 바닥없이 추락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것은 사실의 나열이 진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언론이 검찰의 언론 플레이에 놀아나면서 사실 보도를 넘어 검찰에 동조하고 플레이어로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조국을 응원하는 쪽이나 비난하는 쪽이나 언론 보도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고 한국 사회는 토론의 진전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이 지적한 것처럼 “팩트는 뉴스의 한 재료일 뿐 뉴스의 전부가 아니며 훌륭한 뉴스의 가장 좋은 부분은 아니라는 요점”을 “기자들이 모른다는 듯이 행동한다.” “아무리 사실에 충실한 참된 뉴스라 해도 얼마든지 불공정하고 추악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리 불편부당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진 뉴스라 해도 의심스러운 사실 주장을 포함할 수 있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언론의 정파성 논란은 역설적으로 언론의 설명해야 할 의무를 일깨운다. 이제 더 이상 언론이 세상의 모든 이슈를 다 담고 독자들이 언론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라고 요구하는 독자들도 없지 않지만 계속해서 맥락을 드러내고 구조와 본질을 파고들면서 이해하게 만드는 게 언론의 책무다. 편협한 독자들을 탓할 게 아니라 메시지의 실패를 고민해야 할 때다.

언젠가부터 가르치려 드는 기자들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박영흠은 “시민들은 더 이상 기자가 정해놓은 기사의 ‘야마’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언론에 보도된 정보를 나름의 방식으로 교차 검증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한 ‘야마’를 위한 과장과 왜곡을 그대로 믿지도 않는다.” “‘야마’의 관행이 언론을 멀리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TBS 뉴스공장이 JTBC 뉴스룸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을 이 땅의 언론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순위에서도 김어준은 손석희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유시민이 3위, 진중권이 6위, 주진우가 8위에 올랐지만 10위 안에 손석희와 김주하(9위) 외에 전통적인 언론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가 많지 않다는 것도 가슴 아픈 대목이다.

‘스트리밍 저널리즘’의 시대.

바야흐로 ‘스트리밍(streaming) 저널리즘’의 시대다. 신문 1면에 기사가 뜨면 세상이 흔들리던 시대가 있었다. 9시 뉴스에 뜨면 세상 사람 모두가 알게 됐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종류의 채널에서 하루 종일 뉴스가 흘러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뉴스가 발생하고 진화하고 의미를 더하는 모든 과정을 공유한다. 뉴스를 패키지 단위로 소비하던 시대에서 수많은 채널의 타임라인을 취사선택하는 시대로 옮겨온 지 오래다.

이제 이슈는 발생하는 순간 빛의 속도로 확산되고 검색과 댓글과 커뮤니티와 만나면서 새로운 해석과 사회적 의미를 얻게 된다. 주류 언론이 의제 설정의 중심에 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8시 뉴스든 9시 뉴스든 지상파 뉴스 40분을 견디기에는 우리 모두에게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뉴스에 기대하는 것들이 여기에는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자들이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거나 정작 알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실험하고 도전할 용기가 없다는 게 현실이다. 출입처 관행을 바꾸려면 단순히 출입처 기자실에 앉아있지 않겠다는 정도를 넘어 이슈를 발굴하고 문제에 접근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모든 과정을 바꿔야 한다. 애초에 문제는 출입처가 아니라 뉴스 가치에 대한 인식이고 어느 자리에 앉아있느냐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이제는 기자가 뭔가를 틀어쥐고 있으면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세상이 아니고 기자들이 뭔가를 외친다고 해서 그렇게 바뀌는 세상도 아니다. 신문사와 방송사 다 해봐야 몇 군데 안 되던 시절에는 그런 게 가능했겠지만 문제는 아직도 많은 기자들이 그 시절 신문을 만들고 방송을 만들던 방식으로 현장에 접근한다는 데 있다. 지금은 기자들에게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진단과 분석을 요구하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가 언론의 위기라고 말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위기의 징후라기 보다는 원인에 가깝다. 언론이 광고주와 결탁하는 것은 그게 아니면 신문사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다음에 어뷰징 기사가 쏟아지는 건 그게 그나마 언론사 사이트 유입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값싼 트래픽이라도 낚아야 다른 기사를 좀 더 읽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바닥을 향한 경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다.

높아진 기대 수준, 구태의연한 언론.

독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건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어나면 방역에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방역 단계를 강화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언론의 이중성 때문이다. 개천절 집회를 금지한 것을 두고 ‘재인 산성’이라고 비판하는 언론도 있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의지할 곳을 찾는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코로나 범프(충돌, bump)’로 주요 신문사들 유료 구독이 늘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

최근에는 독감 백신도 논란이 됐다. 이렇게 엄혹한 시절에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독감 백신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것은 우물에 독을 푸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독감 백신의 부작용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직접적인 연관성이 입증된 바 없고 노인 접종이 늘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언론이 오히려 루머를 퍼나르면서 공포와 불신을 부추겼다.

종합부동산세가 두 배 올랐다고 보도하면서 정작 아파트 시세가 얼마나 뛰었는지 생략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늘어놓는 것도 익숙한 장면이다. 실제로 종부세 대상은 주택 소유자의 3.6% 정도고 시세 15억 원 아파트라도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수준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기사에는 최소한의 균형과 논리를 갖춰야 한다는 게 대부분 독자들의 문제의식이다.

지난 6월 이른바 인국공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 요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하자 한 언론사가 “연봉 5000만 원 소리 질러”라는 내용의 익명 대화방 캡처를 기사로 내보냈고 여러 언론사가 이 기사를 베껴썼다. 애초에 출처도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연봉 5000만 원이란 것도 사실이 아니고 애초에 비정규직 차별 이슈를 취업준비생들과의 갈등으로 프레임을 왜곡한 기사였다.

추미애와 윤석열이 대립할 때 필요한 기사는 누가 이기는가 보다 쟁점을 짚고 의미를 읽어주는 기사다. 그리고 추미애-윤석열 이슈가 가리고 있는 것들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짜 중요한 이슈를 드러내는 기사가 필요하다. 강준만의 표현대로 ‘해장국 언론’을 찾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 보다는 기꺼이 맥락을 찾고 진실을 갈망한다. 우리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해 달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에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언론의 변화는 뻔한 기사를 쓰지 않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다른 기사를 발굴해야 한다. 계속해서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연합뉴스가 쓰는 것은 연합뉴스의 몫으로 남겨 두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발생 사건에 한 템포 늦더라도 사건의 이면과 맥락을 추적하고 구조와 본질을 파헤치는 기사에 주력하는 게 스트리밍 저널리즘의 시대에 존재감을 만들고 영향력을 확장하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손석희 앵커 시절 JTBC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건 그가 늘 썼던 표현대로 “한 발 더 들어가는” 보도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손석희의 시선 집중’ 시절 수많은 인터뷰이를 찜쪄 먹었던 그 실력으로 기자들을 몰아붙였고 기자들은 생방송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했다. 발굴 특종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으로 뉴스의 이면을 파헤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저널리즘의 원칙’에서 강조한 것처럼 “너무 좋아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너무 나빠 보이는 것 역시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과 전달 방식 때문에 외면 당할 가능성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진실을 재단하고 규정할 수 있다고 믿는 기자들의 기묘한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가 독자들을 멀어지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언론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이게 모두 ‘기레기’들 때문이고 언론은 모두 타락했고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한탄하고 냉소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여전히 취재 현장에서는 사실의 단편을 추적하고 진실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해 고민하는 기자들이 많다. 읽을 게 없다고들 하지만 한겨레 N번방 연속 취재나 경향신문의 산업재해 기획이나 서울신문의 쪽방촌 르포처럼 빛이 나는 기사도 많다.

뉴스 없는 미디어의 시대, 그리고 독자 없는 언론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벗어나야 하고 끊임없이 맥락을 다시 구성하고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독자들의 압박에 굴복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설명하고 사안의 이면을 파헤치고 폭넓게 공유해야 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을 더 잘하는 것 이상의 해법이 있을 수 없다. 익숙한 관행과 문법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을 좇지만 한때 전부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성격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계속해서 실수를 인정하고 오해를 바로 잡지 않고서는 뉴스 브랜드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을 재단하거나 심판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다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의제를 제안하고 토론에 참여할 뿐이다. 위기의 한국 언론에 필요한 것은 진실 앞에 더욱 겸허한 태도다.

우리는 계속해서 절망할지언정, 저널리즘에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실을 추적하는 현장의 기자들이 있고 사람들의 선의와 우리 모두가 합의하는 원칙이 조금씩이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세상이 더욱 암울해 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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