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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꺼리는 은행에 불이익 주는 법 만든다.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9, 2005

미국에 지역재투자법이 있다면 일본에는 금융평가법이 있다. 둘다 금융기관에 금융의 공공성을 강제하기 위한 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중소기업 대출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기준으로 은행의 영업 확장에 제한을 둔다. 중소기업 대출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법이다. 이 법의 제정을 주도하고 있는 야마구치 요시유키 릿쿄대학 교수가 9월 8일 금융경제연구소 초청으로 내한했다. 야마구치 교수의 설명으로 금융평가법의 설립 목적과 추진 현황, 향후 과제 등을 듣는다.

야마구치 교수가 금융평가법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1999년 말의 일이다. 그 무렵 중소기업가동우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출심사가 강화되거나 대출액이 줄어든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17.9%의 기업가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도쿄를 포함한 간토 지방만 놓고 보면 이 비율은 24.7%까지 치솟았다. 4명의 기업가 가운데 1명이 대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야마구치 교수가 분노했던 것은 일본 정부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30개 은행에 무려 8조엔 이상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은행은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서라도 살려야 하는 사회적 자산이다. 야마구치 교수는 이렇게 국민의 세금으로 살려낸 사회적 자산을 일부 국민들이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금융의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분노는 너무나 정당했습니다. 은행의 부실은 결국 은행의 방만한 경영 탓 아닙니까. 그 부실의 책임을 대출 축소 등으로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야마구치 교수가 정의하는 금융의 공공성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분야에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되는 것’이다. 일본의 은행법에는 이미 “은행의 공공성을 감안해 신용을 유지하고 예금자 등의 보호를 확보하는 것과 함께 금융의 원활을 도모한다”는 조항이 있다. 야마구치 교수는 금융의 원활이라는 것이 곧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분야,이를테면 중소기업에 자금이 원활이 공급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결국 금융의 공공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다. 다른 말로 하면 중소기업 대출을 은행에 어떻게 강제할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금융평가법이다. 은행이 특정 지역의 중소기업 대출을 위해 노력하는 정도를 평가하고 그 평가 결과를 기준으로 지점의 설치와 합병 등에 제한을 두자는 게 이 법의 핵심이다. 고객들은 평가 결과를 보고 어떤 은행이 지역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는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은행은 자기자본비율로 자산의 건전성을 평가받아왔지만 금융평가법이 제정되면 공공적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는 은행은 사회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법안은 대출에 목말라하던 중소기업 경영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중소기업가동우회를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확산됐고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

물론 은행의 경영자유를 뺏는다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야마구치 교수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박했다. “정부는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죽어가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한 건 은행이 갖고 있는 공공성 때문입니다. 그 공공성의 관점에서 은행의 업무 상태를 점검하겠다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공적자금을 받는 건 좋지만 그 돈이 잘 쓰이고 있는지 점검할 수 없다는 건 모순이지 않을까요.”

금융평가법은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태다. 이 법안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금융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일본 사회에 확산시킨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대중적 지지기반이 큰 힘이 됐다고 야마구치 교수는 평가한다. 일본 정부는 최근 지역 금융기관에 내려 보내는 지침서에서 “부실채권을 무리하게 처리하기 보다는 부실한 기업의 회생을 돕고 부실채권을 줄여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일본의 금융평가법은 1977년에 도입된 미국의 지역재투자법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다. 야마구치 교수는 “지금까지는 미국의 은행들이 일본에 들어오면 자기자본비율만 맞추면 됐지만 앞으로는 이들에게도 금융 공공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돈을 모아 미국으로 모두 송금하더라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 야마구치 교수는 “그동안 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던 일이 일본에서는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면서 “세계화 시대에 해외 금융기관들의 일본 진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제대로 된 규정을 만들고 지키도록 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금융평가법 법제화 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도 IMF 외환위기 이후 은행의 기업대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제조업 설비투자 가운데 은행 차입금 등 외부자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75%를 웃돌았는데 1999년 들어 30% 정도로 줄어들었다가 지난해에는 15.6%에 그쳤다. 설비투자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0년 12.8%에서 지난해에는 9.5%까지 줄어들었다.

조복현 한밭대 교수는 “금융산업은 적절한 규제가 없을 경우 단기적이고 투기적이 되기 쉽고 실물 투자의 지체와 금융 불안정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적절한 금융 규제는 금융의 공공성을 넘어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도 “시민사회의 합의에 기초해 금융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이를 제도화하고 강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박경 목원대 교수는 “금융평가법이 금융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그 효과는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민간 금융기관이 영리기업인 이상 공공성의 리스크를 모두 부담할 수는 없다”면서 “정부 차원의 중소기업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또 “미국 지역재투자법의 경우도 전체 은행의 99%가 우량 판정을 받고 있다”며 “한국 실정에 맞는 인센티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에서도 열린우리당 이상경 의원 등이 관련 법안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 의원은 “단순히 법안 제정에 그치지 않고 은행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지역재투자법과 금융평가법.

야마구치 교수가 처음 금융의 공공성을 구상했던 1999년은 고이즈미 정권이 은행에 부실채권 정리를 요구하던 무렵이었다. 10년 가까이 장기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실기업을 퇴출하고 경제의 체질을 바꾸자는 발상에서 나온 대안이었다. 문제는 한 기업이 무너지면 그 기업과 거래하던 기업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부실채권이 계속 확산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부실채권은 계속 늘어나고 은행의 부실채권 처리가 기업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은행은 대출을 기피하거나 심지어 만기도 안 된 대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변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금융평가법은 이런 위기의식에서 만들어졌다.

금융평가법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지역재투자법의 골격을 그대로 따랐다. 미국의 금융기관은 기본적으로 두개의 자격요건을 만족시켜야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 자기자본비율이 10%를 넘어야 하고 지역재투자법 평가등급을 2등급 이상 받아야 한다. 중소기업과 저소득층 대출의 비중이 등급심사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1977년에 만들어진 이 법은 특히 인종에 따른 금융 차별을 해소하는데 목표를 뒀으나 최근에는 중소기업의 자금 지원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의 금융평가법은 지역재투자법에서 한발 더 나가 이용자 편의 등의 항목을 추가한 것이 특징이다. 연대보증을 강요하는 등 은행과 고객의 불평등한 관계를 능동적으로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발상에서다. 평가 결과는 인터넷 등을 통해 정기적으로 일반에 공개되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은 은행은 홍보는 물론이고 고객 확장과 실적 개선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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