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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들의 수박 겉핥기 한국 경제 전망.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9, 2005

9월 6일과 7일, 이틀 동안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산업혁신포럼은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전략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이른바 해외 석학들이 대거 초빙됐고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관심이 쏟아졌다. 언뜻 탁월한 식견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한국 경제에 대한 이들의 분석과 전망은 원론에 머물거나 겉돌기 일쑤였다.

산업자원부가 야심차게 기획한 이번 행사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틀 동안 1천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들었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정작 혁신의 전략이라고 나온 아이디어들은 모두 구태의연했다. 구색을 맞추려고 불려온 석학들은 최소한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의 성의 없는 한국 경제 분석에 이틀 동안 온 나라가 호들갑을 떤 꼴이다.

무엇보다도 국가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선봉에 나선 레스터 써로우 같은 사람을 불러야했는지 의문이다. MIT대학 경영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써로우는 미국 민주당 신자유주의 파벌의 씽크탱크로 불린다. 일찌감치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사회가 온다”고 예견했고 세계화에 앞장서서 동참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 그가 한국 경제의 성장 전략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행사에서 써로우는 시종일관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답변으로 비난을 샀다. 그는 “한국은 왜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은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청중들의 반박이 쏟아지자 “한국인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쏘아붙였다. 참고로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4162달러로 대만의 1만2382달러보다 많다.

써로우는 “내가 대만 반도체 회사에서 사외이사를 하고 있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다가 나중에 기자회견 때는 “수치상으로는 한국이 높지만 공식 수치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오히려 “GDP가 높든 낮든 이웃으로부터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면서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벤치마킹에 열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라고 비판의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대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각각의 장점을 취해서 섞는 게 좋다”는 등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했다.

써로우는 산자부가 2015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3만5천달러를 달성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선진국도 연간 7% 이상의 성장을 하기 어렵다”며 “조금은 비관적으로 본다”고 말해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또 “선진국 하는 걸 다 하겠다고 하는데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전략으로 가는 게 좋다”며 “한국 정부가 내놓은 혁신전략에는 이런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마라토너의 정신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훈계하기도 했다.

분단 상황과 관련해서는 “과거 독일의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돼 있어서 엄청난 통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북한을 흡수할 수 있다”면서 “북한의 저렴한 인건비가 통일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인센티브로 작용할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사회보장제도의 부정적인 측면에만 주목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상이었다. 써로우의 한국 경제 진단은 지극히 단편적이었고 편협했다. 그는 심지어 발제 자료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이름값을 못했다. “한국의 대기업 의존도와 수출 비중이 너무 높다”는 그의 지적은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대안으로 “제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지식 산업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어쩌면 미래학자에게 한 나라의 성장전략을 묻는 것부터 적절치 못했을 수 있다.

토플러는 “한국도 기술 개발 뿐만 아니라 여러 기술의 유기적 결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으로는 이런 결합이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낼 거라는 이야기다. 그는 특히 한국의 생명공학 산업과 영화 산업에 관심을 보였다. “영화 수출을 더 많이 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까지는 주류라고 할 수 없지만 헐리우드에서도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토플러는 “한국은 일본의 모델을 뒤따라 짧은 기간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일본처럼 버블 경제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며 “작지만 강한 경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제조업 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지식 산업에 집중하고 수출과 내수의 조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선언적인 전망을 쏟아냈지만 대부분 가벼운 감상에 그쳤고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력관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제프리 페퍼 스탠포드대학 교수 역시 한국에 대해 아이디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내 “한국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이라고 답변을 시작했다. 당연히 답변에는 아무런 핵심이 없었다. 조화로운 노사관계가 필요하다는 원론을 거듭 강조했을 뿐이다.

페퍼는 “한국 기업들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조화로운 노사관계를 위해서는 권한과 의사결정을 적절히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기업의 경쟁력은 상품이나 서비스보다는 사람에서 나온다”며 “적대적인 노사관계 해결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페퍼는 “인적자원의 관리가 미래 기업들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키워드”라며 “국적과 성별, 연령 등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가 기업의 성공을 가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강대국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에서 공급된 노동력을 차별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며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민을 폭넓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마쓰시마 가쓰모리 도쿄대 교수는 지나친 중국 위협론을 경계했다. 마쓰시마 교수는 “중국은 에너지 부족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하기는 어렵다”며 “중국의 성장에 대한 과민반응은 오히려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위용딩 중국 사회과학원 경제정치연구소장은 한중일 3국의 공동통화와 경제공동체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 산업혁신포럼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의 벽을 넘어보자는 취지에서 산자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행사였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고 쟁쟁한 석학들을 불러들여 구색도 제대로 갖췄다. 그런데도 정작 내용은 대학의 교양강좌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비난이 많았다. 그야말로 먹을 것 없는 잔치였다. 외국 석학들의 어정쩡한 훈수에 기댈 게 아니라 한국식 성장모델에 대한 고민을 모아야 할 때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앨빈 토플러의 ‘초 복잡성 시대’.

“잉여 복잡성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이 시작된다.”

기자회견에서 앨빈 토플러가 특별히 헤드라인으로 뽑아달라고 주문한 문장이다. 토플러는 “최근 자동차를 새로 장만했는데 계기판에 단추만 49개에 사용법을 담은 책자가 무려 700페이지나 됐다”면서 “누가 이걸 다 읽어보고 이 기능을 다 사용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토플러는 이걸 ‘초 복잡성’ 또는 ‘잉여 복잡성’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현상이 모든 분야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를 쓴다면 생각해 보라. 그 수많은 기능 가운데 몇가지나 제대로 쓰는가. 지금이야 기업이 주는대로 받아쓸 수밖에 없지만 머지않아 소비자들의 저항이 시작될 것이다. 더 간단하고 더 싼 제품을 찾게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

토플러는 초 복잡성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이른바 개인별 맞춤화가 기업의 성공 관건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는 기능을 과감히 없애되 개인의 구체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드는 과정은 복잡해도 좋지만 소비자들이 쓰기에는 최대한 간편해야 한다. 소비자들의 저항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토플러가 소개한 미래 경제의 네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스피드 시대에서 생기는 속도의 격차다. 미국의 글락소가 스미스 클라인을 인수한 뒤 다른 분야는 재빨리 통합했으나 연구개발(R&D) 부문의 통합이 늦어지는 바람에 경쟁사에 뒤진 게 대표적 사례다. 둘째는 맞춤 생산 시대다. 셋째는 초 복잡성 시대. 너무 여러 기능을 덧붙이다 보니 정작 소비자들의 요구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경계의 붕괴다. 드라마와 광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음악의 장르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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