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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파산해야 경제가 산다.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6, 2005

파산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1만4천여건, 지난해 전체 신청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이들은 해이해질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자살직전의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 이들에게 파산은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비상구다.

“개인회생 신청할 사람 있어요? 손 들어보세요.” 몇 사람이 쭈삣쭈삣 손을 든다. 사회자는 묻는다. “그래요? 여러분들, 일정한 직업이 있어요?” 다들 손을 내린다. 사회자는 말한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왜 개인회생을 하려고 합니까. 파산을 하세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민주노동당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나홀로 파산 강좌의 한 장면이다. 처음에는 놀랍고 낯설다. 이 강좌에서는 변호사 도움 없이 스스로 파산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주마다 50여명씩 강당에 가득 들어차고 자리가 부족해 서서 듣는 사람도 많다. 모두 갈 데까지 내몰려 막바지에 파산 신청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변호사를 살 비용조차 없다.

핵심은 이렇다. 이들은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그야말로 자살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 채권기관이 이들에게 빚을 받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민주노동당은 이들의 채권 가치를 0원으로 본다. 그 0원을 0원이라고 법적으로 확인해주고 이들을 채무의 압박에서 풀어주는게 바로 파산과 면책이다. 그게 이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 문유석 판사는 말한다. “이들은 빚을 안 갚는 게 아니라 못갚는 것이다. 파산이란 그동안 갚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어차피 못갚는 빚, 정리해주지 않으면 이들은 국민 세금에 의존하는 사회복지 대상자가 되거나 노숙자 또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자. 무엇이 전체에게 이익이 될까.”

문 판사는 파산자를 세 종류로 나눈다. 첫번째, 겨우 벌어서 겨우 먹고 살다가 실업이나 질병 등 갑작스러운 일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사람들. 두번째,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겠다고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다 망한 사람들. 세번째, 정과 핏줄에 목이 매 부모형제나 친척의 빚보증을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문 판사는 묻는다. 이들을 벼랑 끝 자살로 몰아붙여서 우리 사회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이날 민주노동당 파산 강좌에서 만난 일용직 건설 노동자 김아무개씨는 1500만원 정도 카드와 사채 빚이 있다고 했다. 김씨는 첫번째 경우다. 지난해 허리를 다쳐 쓰러지면서 일을 못하게 되자 한동안 카드 빚으로 살았고 그게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많은 빚은 아니지만 다섯식구의 가장인 그는 원금은커녕 이자조차도 갚을 형편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허리가 좋지 않다. 그의 월 수입은 80만원도 채 안 된다.

평생 걸려도 갚지 못할 이 빚을 털어낼 수 없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김씨는 파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채업자들 빚 독촉 전화에 자살까지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인생의 막바지에서 민주노동당의 길거리 상담을 만났고 파산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여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한가닥 희망을 찾게 됐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임동현 국장은 1억원에 가까운 카드 빚을 진 할머니의 사례를 소개했다. 정부 보조금 21만원으로 사는 이 할머니는 전기도 수도도 끊기게 될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산강좌를 찾아왔고 결국 파산 면책에 성공했다. 이 할머니는 직접 카드회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채무내역을 떼 왔고 그 과정에서 숱한 싸움도 치렀다. 빚에서 풀려난 할머니는 이제야 마음 편히 발뻗고 잠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문제는 파산 신청을 하는데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든다는데 있다. 변호사 비용을 빼고도 인지대와 송달료, 관보 게재료, 신문 공고료 등을 포함하면 최종 면책을 받기까지 최소 50만원에서 많게는 80만원 정도가 든다. 파산 신청까지 내몰린 사람들에게 이 정도 비용은 큰 부담이다. 게다가 법률사무소에 맡기면 보통 100만~200만원 정도를 변호사 비용으로 요구한다. 이날 파산 강좌에서 강사로 나선 송병춘 변호사는 굳이 법률사무소에 맡기지 않아도 조금만 공부하면 직접 서류를 작성하고 신청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파산 비용은 직접 마련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채무를 벗어나려는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파산과 개인회생의 차이를 잘 구분하라고 조언한다. 파산은 빚잔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빚을 청산하는 절차를 말한다. 파산 결정에 이어 면책 결정이 나면 모든 채무는 법적으로 사라진다. 개인회생은 계속적이거나 반복적인 수입이 있는 경우 최저 생계비의 1.5배를 제외한 나머지 소득으로 3년에서 8년 이하의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을 변제해주면 채무를 소멸시켜주는 제도를 말한다. 안정적인 직업이 있으면 개인회생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파산·면책으로 가는 게 좋다.

배드뱅크나 신용회복위원회 등 사적 채무조정의 차이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사적 채무조정은 채권금융기관들이 모여서 만든 제도다. 파산이나 개인회생 등 공적 채무조정이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채무를 털어내주는 제도라면 이들 사적 채무조정은 어떻게든 이들에게 빚을 갚도록 만드는 제도다. 문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위협받고 있는 절대 빈곤층의 경우다. 송 변호사는 묻는다.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갚으라고 계속 윽박지르면 어떻게 하나.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은 빚을 갚지 않는 게 아니라 못 갚는 거다. 파산을 해야 할 사람들은 파산을 하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올해 들어 파산신청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절망적인 채무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법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6월까지 1만3931건의 파산신청이 들어왔다. 지난해 전체 1만2317건을 넘어서는 규모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면책 비율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경우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체 파산 신청 9566건 가운데 50.5%인 4830건에 파산결정이 났고 이 가운데 98.9%인 4776건에 면책결정이 났다. 면책 비율이 높다는 건 법원이 이들의 신청을 기각하기 어려울만큼 이들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이야기다.

송병춘 변호사는 파산이 지금보다 더 활성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노동당은 적어도 10만명 이상이 사실상 파산상태에 놓여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 차원의 파산지원제도를 만들 필요도 있다. 법률구조공단이 있지만 파산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여력이 없기 때문에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200만원 정도 드는 비용 가운데 일부를 정부가 보조해주거나 시민단체를 구성해 파산 신청을 돕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부러 빚을 잔뜩 지고 갚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를 둘러싼 논란에 민주노동당 송태경 실장은 말한다. “도덕적 해이는 빌린 사람의 몫이 아니라 빌려준 사람의 몫이다. 갚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빚을 내줬을 때는 채권금융기관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파산이 활성화되면 좀더 꼼꼼히 대출 자격을 따지게 될 거고 저소득 계층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부실대출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이선근 본부장은 한발 더 나가 정부 차원의 채권 탕감을 주장한다. “저소득 계층의 생계형 채무 규모는 75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 부실 채권은 시장에서 10% 정도에 팔리는데 정부가 이를 사서 소각한다면 7.5조원 정도가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은행 하나 살리는 정도의 돈으로 저소득 계층 채무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핵심은 이들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산다는 것이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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