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 싸고돌던 금감원, 모처럼 강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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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자본 앞에 쩔쩔매던 금융감독원이 모처럼 강한 모습을 보였다. 금감위 증권선물위원회는 22일 영국계 헤르메스펀드를 불공정거래 혐의로 검찰에 고발조치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외국자본에 유화적인 입장을 보여왔던 금감원으로서는 꽤나 파겨적인 결단을 내린 셈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헤르메스펀드의 아시아 지역 총괄 펀드매니저 로버트 클레멘츠는 지난해 3월 삼성물산 주식 777만2천주를 취득한 뒤 삼성물산의 M&A 가능성을 언론에 흘린 혐의를 받고 있다. 클레멘츠는 특히 11월 29일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자청해 이같은 허위사실을 발표한 뒤, 주가가 오르자 12월 3일 보유주식을 전부 내다팔아치워 292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바 있다.

금감원은 헤르메스가 부당하게 취득한 이득이 8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증권거래법에 따르면 부당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고의로 풍설을 유포하거나 위계를 쓴 행위는 증권거래법 제188조 사기적 부정거래 금지 조항에 위반된다. 이 법은 부당이득규모가 50억원이 넘을 경우 징역형으로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벌금은 부당하게 취득한 금액의 3배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헤르메스의 경우 80억원의 3배, 최대 240억원까지 추징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금감원은 이날 클레멘츠와 헤르메스, 그리고 이들과 공모한 대우증권 영국법인 김아무개 대리를 함께 고발조치했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헤르메스의 불공정거래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올해 3월 영국 현지조사까지 다녀왔으나 결과를 밝히지 않고 7개월 가까이 시간을 끌어왔다. 이같은 금감원의 소심한 태도에는 외국자본 차별론을 주장하는 <파이낸셜타임즈> 등 해외 언론의 견제도 한몫을 했다. 그런 금감원이 예상을 뒤엎고 검찰고발이라는 강도높은 조치를 들고나온 것이다.

고발이 접수되면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하고 3개월 이내에 잠정적인 결론을 금감원에 통보해야 한다. 과거 워버그핀커스 등의 불공정거래가 검찰에 통보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검찰 고발은 지금까지 외국 금융기관에 대한 금감원 징계 가운데 최고 수위라고 볼 수 있다.

헤르메스는 이날 홍보대행사를 통해 보도자료를 내고 “헤르메스가 얻은 이익은 장기 투자로 얻은 것이며 인터뷰 직후에는 오히려 주가가 떨어졌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또 “헤르메스가 삼성물산을 M&A하려 한다는 오해가 많아 해명 차원에서 인터뷰를 자청했던 것이며 이로 인한 부당이득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파이낸셜타임즈’는 금감원 발표를 하루 앞둔 22일 “한국이 헤르메스를 검찰에 고발할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우리 정부의 외국자본 규제를 여러차례 비판해왔던 이 신문은 “금감원이 헤르메스를 본보기로 삼아 한국은 투기꾼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외국 투자자들에 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금감원이 모처럼 단호하게 맞섰지만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실제로 ‘조선일보’에 헤르메스의 인터뷰가 나가던 날 삼성물산의 주가는 1만5300원에서 1만5850원으로 조금 올랐으나 그뒤 이틀 연속 떨어져 이들이 주식을 팔던 12월 3일에는 1만4300원까지 떨어졌다. M&A 소문과 언론 인터뷰로 주가를 띄웠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주식 매각 직전의 ‘조선일보’ 인터뷰도 의견이 엇갈린다. 헤르메스는 “인터뷰에서 ‘삼성물산을 M&A 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밝혔을뿐 구체적인 시도나 그 세력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했다”고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금감원 관계자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고찬태 금감원 조사2국 팀장은 “7차례 정도 언론보도가 있었지만 막판의 인터뷰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검찰고발도 능사는 아니다. 국내 비거주 외국인의 경우 검찰에 출두하지 않아도 강제로 구인할 수는 없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기소중지로 끝나는 등 사실상 아무런 제재조치도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태철 금감원 부원장보는 “이들이 기소중지 상태에서 국내 영업을 계속하더라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정종남 사무국장은 “헤르메스에 대한 이번 제재 조치가 일회성 실적내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관련 법제도의 정비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단 공은 검찰에게 넘어갔고 금감원은 이제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태도다. 금감원은 대외적으로 명분을 챙기고 손을 턴 셈이지만 헤르메스는 결국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법이 그만큼 허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금감원을 비롯한 정부에 의지가 없다. 그동안 외국자본의 횡포에 대해 줄곧 수수방관해왔던 금감원은 이번 헤르메스의 경우도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금감원은 이에 앞서 한국씨티은행의 부동산담보대출 관련 사기혐의와 관련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금융산업노조 한미은행 지부는 19일 한국씨티은행을 사기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노조에 따르면 한국씨티은행은 변동금리 부동산 담보대출을 취급하면서 변동금리가 아닌 고정금리로 대출이자를 받아 74억원 규모의 불법이득을 취득해 왔다. 2001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한국씨티은행의 담보대출 금리는 7.9% 수준으로 6.6% 수준의 다른 은행보다 최대 1.3%나 높았다. 박선오 한국씨티은행 홍보부장은 “씨티은행 서울지점 시절, 점포 수가 많지 않아 조달금리가 높았기 때문에 금리하락을 바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사실상 노조의 주장을 시인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문제를 보는 금감원의 태도다. 금감원은 일찌감치 이같은 사실을 파악했으면서도 지난 3월 금리인하 권고안을 내놓는데 그쳤고 그 이후 시정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노조의 거듭된 문제제기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검찰 고발 이후에도 검찰의 움직임을 지켜보겠다는 태도다. 금감원은 지난달 노조가 씨티그룹 모은행의 자금유출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도 기꺼이 발벗고 나서서 은행을 변명해주기에 바빴다.

씨티그룹은 한미은행을 인수하는데 4조원을 들였는데 이 가운데 3조7천억원 가량이 대주주 신용공여 등으로 빠져나간 상태다. 노조는 씨티그룹이 임시로 급전을 융통해 한미은행을 인수한 뒤 한미은행 자산을 빼내 그 급전을 변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감원은 이런 노조의 주장에 맞서 이례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한미은행의 신용공여는 유휴자금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열사간 거래일뿐”이라고 반박했다.

금감원은 SK의 지배구조를 위협하면서 1조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올리고 빠져나간 소버린자산운용에 대해서도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금감원은 금융기관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없는 칼라일이나 론스타펀드에게 국내 굴지의 은행을 넘겨주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과정에서 일부 법조항을 무시하거나 자의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내 금융기관 앞에서 그렇게 서슬퍼렇던 금감원이 외국자본 문제에서는 꼬리를 내려왔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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