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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와 김우중, 냉정하게 바로보기.

Written by leejeonghwan

June 17, 2005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약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다면 대우는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위기를 잘 버텨내고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올라섰다면 대우는 지금의 삼성 못지 않은 큰 기업으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부질없지만 그럴듯한 가정이다. 대우의 꿈은 삼성보다 더 컸다.

외환위기가 터진 그 이듬해 김우중은 500억달러 무역흑자를 만들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외환 확보에 목을 맸던 김대중 정부는 대책없이 이에 말려들었다. 김우중은 정부의 지원을 업고 마구잡이로 빚을 끌어쓰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환율과 금리가 치솟으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1조원이던 빚이 26조원까지 늘어났고 부채비율은 600%에 육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장 예측도 실패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던 인도나 동유럽의 공장은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 가동률은 50%에도 못미쳤다. 그때 대우는 밑빠진 독이었다. 빚은 계속 늘어나는데 현금이 돌지 않았다. 막판에는 석달짜리도 안돼서 하루짜리 어음을 끌어다 썼고 그마저도 갚지 못하게 되자 부도를 낼 거면 내보라고 은행에 협박까지 했다.

시장에서는 대우 채권이 쏟아져 나왔고 대우의 위기가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될 분위기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결국 1998년 7월 단기 기업어음 발행한도를 제한한데 이어 회사채 발행한도까지 제한해 쓰러져가는 대우의 숨통을 졸랐다. 벼랑 끝에 몰린 대우는 그해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GM에서 50억달러를 끌어들이려던 계획도 실패했다.

이듬해 7월 김우중은 경영권과 재산을 모두 내놓을 테니 급한 빚을 막을 수 있도록 4조원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 최후의 발악도 발등의 불을 껐을뿐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었다. 언 발에 오줌 누기 마냥 4조원은 흐지부지 사라졌고 대우는 결국 1999년 8월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빚은 500억달러, 그 무렵 환율로 62조원에 육박했다.

대우의 몰락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대우는 19조원에 이르는 채권을 남발했는데 몰락 이후 이 채권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됐다. 대우 채권을 들고 있던 투자신탁회사들은 모두 직격탄을 맞았다. 255조원의 수탁고 가운데 대우 채권이 포함된 펀드가 110조원 규모에 이르렀다.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돈을 찾겠다고 나서는데 내줄 돈이 없었다. 결국 정부가 그 뒷돈을 댔다.

255조원이었던 수탁고는 이듬해 5월 157조원까지 줄어들었다. 이른바 대우채권 환매사태다. 그 과정에서 정부가 쏟아부은 공적자금은 무려 29조7천억원에 이른다.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투신사들은 부실을 피하지 못했고 그 불똥은 은행권까지 튀었다. 순진한 투자자들이 엄청난 손실을 봤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유행처럼 번졌던 바이코리아 열풍의 참담한 결말이었다.

투신사들이 무너지면서 우리 경제는 그 후유증을 오래 앓았다. 주식과 채권시장은 외국 투기자본의 무대가 됐고 외환위기 이후 매물로 쏟아져 나온 알짜배기 기업들이 잇따라 헐값에 팔려나갔다. 투신권이 매수여력을 잃으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부를 약탈해가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국내 우량기업의 외국인 지분비율은 과반을 훌쩍 넘어섰다.

뿐만 아니다. 대우의 몰락은 부실을 금융권과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대우 채권은행이었던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엄청난 공적자금을 수혈 받고도 결국 외국 투기자본에 넘어갔다. 투신사들은 부실을 벗어나려고 카드채권 등 위험자산에 손을 댔고 결국 2003년 카드채권 사태를 불러오기도 했다. 대우의 몰락은 혹독한 금융권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거나 합병됐고 외국에 팔려 나갔다. 이른바 금융주권이 흔들리는 지경이 됐다.

이제 기업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는다. 은행이 빌려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모험을 꺼린다. 새로운 공장을 짓고 매출을 늘리기 보다는 사람을 잘라서 이익을 늘리는데 골몰한다. 은행은 개인대출과 수수료 수입에 집중하고 몇몇 대기업을 빼면 우리 경제는 눈에 띄게 활력을 잃고 있다. 가계부채는 급증하고 내수는 바닥을 기는데 기업 이익은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대우 몰락과 IMF 외환위기를 경험하면서 우리 경제는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아마도 그런 변화는 비가역적인 것처럼 보인다.

IMF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면 대우는 그 이전 시대의 기업이었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 시대, 이제 대우 같은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는 대우가 망한 책임을 묻고 있지만 이제 대우 같은 기업은 나올 수도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게 현실이다. 빚을 내서 사업을 하고 돈을 벌어서 갚겠다는 발상은 이제 먹혀들지 않는다. 대우는 운이 나쁘기도 했지만 부패했고 무엇보다도 어리석었다. 그래서 무모했고 그래서 망했다.

이제 와서, 대우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가정은 부질없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또는 정부가 좀 더 도와줬더라면, 하는 가정도 모두 마찬가지다. 22조9천억원의 분식회계와 200억달러의 외환 유출이 없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대우가 부패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는 건 핵심을 벗어난다. 우리는 냉정하게 봐야 한다. 대우가 만약 정직하고 건실한 기업이었다면 망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우리는 대우와 김우중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한다. 동시에 우리는 대우의 몰락이 가져온 변화, 대우가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변화에 저항해야 한다. 기업이 권력을 업고 금융을 지배하던 시절에서 이제 금융이 기업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가 됐다. 우리의 진짜 적은 늙고 쇠락한 김우중이 아니라 대우의 몰락을 기회로 우리 금융시장을 장악해버린 국적 없는 투기자본의 공세다. 아울러 금융자본이 투기자본으로 변모하는 양상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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