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이 북한의 경제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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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귀국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명예회복을 한다 한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어요? 어차피 진실은 시간이 밝혀주게 돼 있는 법, 이젠 내버려두는 수 밖엔 없어요. 역사가 나의 진실을 알아주면 고마운 것이고 설사 역사가 안 알아준다 해도 내가 밝힐 수는 없는 것이죠.”

<문화일보> 12월26일, ‘도올 기자가 만난 사람, 김우중 인터뷰’ 가운데.

김우중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1999년 10월 중국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들렀다가 사라진 뒤 3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문화일보>는 지난해 12월26일과 27일 이틀에 걸쳐 김우중씨 인터뷰를 실었고 모든 신문과 방송이 앞다투어 그 기사를 받아썼다. 그러나 사람들의 궁금함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모처럼 나타난 김우중씨는 “어차피 진실이라는 것은 시간이 밝혀주게 돼 있는 법”이라고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딱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3년만에 나타나 하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무책임했다.

김우중씨는 귀국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명예회복을 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늘어놓는 변명이 참 궁색하기만 하다. 평생을 대의를 위해서만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는데 이제와서 파렴치한 사기꾼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란다. 해외로 재산을 도피시켰다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이란다. 말도 안되는 변명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들어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뭘 주저하는가.

인터뷰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언제 이 인터뷰가 이뤄졌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제 했느냐에 따라서 김우중씨의 발언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김용옥 기자는 언제 어디에서 김우중씨를 만났는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경찰청이 발표한 김우중씨의 출입국 기록을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대략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지난해 11월말 무렵에 만난 것으로 짐작된다. 대통령 선거를 한달남짓 앞두고 있던 때다.

김우중씨는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한 몇일 뒤인 지난해 12월1일 법적 대리인인 석진강 변호사를 통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조만간 귀국하겠다는 뜻을 비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우중씨가 연내 귀국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김우중씨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경기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런 소문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대검찰청도 김우중씨 귀국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보고 대우그룹 수사기록을 다시 검토하는 등 준비작업에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몇년의 움직임으로 볼 때 김우중씨 는 여론이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무리하게 귀국을 고집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다음 정부까지 건너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번 <문화일보>와의 인터뷰는 귀국을 앞두고 국내 여론을 슬쩍 떠보려는 얄팍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김우중씨에게 누구보다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김용옥 기자가 마침 그 역할을 맡은 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정말 절묘했다. 그렇게 보면 김우중씨가 부린 잔꾀에 김 기자가 넘어갔다고 볼 수도 있다.

김우중씨는 분위기를 살피면서 이런저런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씨 귀국과 대우 문제의 해결은 이제 다음 정부의 과제로 넘어갔다. 백기승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 이사는 “노무현 정부가 지난 정부의 정책기조를 그대로 물려받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김우중씨의 귀국은 당장은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새 정부가 김우중씨와 대우그룹 문제를 지난 정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런 저런 상황을 돌아볼 때 김우중씨가 무리하게 귀국을 서두를 이유는 없어보인다. 여론이 돌아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겠다는 속셈이라면 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동안 정부와 김우중씨는 어떤 줄다리기를 주고 받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김우중씨의 귀국은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게 뻔하다. 기소중지 상태에 있는 김우중씨 는 귀국하자마자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보석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크지만 결국 조사과정에서 그동안 숨겨져왔던 갖가지 비리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옳지 못한 돈을 받은 정치인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가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김우중씨가 귀국한다는 소문이 나돌 때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경찰청 외사과는 <문화일보> 기사가 나간 다음날인 지난해 12월27일 김우중씨가 11월16일 태국에 입국했다가 12월1일 로마로 출국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과연 정부는 이때까지 김우중씨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을까. 김우중씨는 검찰의 체포영장이 떨어진 뒤인 2001년 4월부터 7월 사이에도 미국과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전세계에 걸쳐 13개 나라를 여러차례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지난해 8월과 11월에는 두차례에 걸쳐 김우중씨의 부인 정희자씨가 보름 가까이 서울에 머물다 간 것으로 알려졌다. 언뜻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희자씨의 움직임만 제대로 좇았어도 김우중씨를 찾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우중씨 는 지난해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병원에서 장 협착증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지난해 5월에는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초청으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옛날 대우 사람들도 꾸준히 만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되면 정부가 김우중씨를 안잡는 것인가 못잡는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김우중씨의 귀국을 막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제보에 따르면 김우중씨가 지난해 귀국 의사를 갖고 있었는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를 막기 위해 대우 위장계열사를 대거 적발, 검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의혹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난 2001년 11월에도 한참 김우중 연내 귀국설이 나돌았고 비슷한 무렵 예금보험공사에서 김우중씨 은닉 재산을 찾아냈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예금보험공사 발표는 모두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합법적인 매매 절차를 거친데다 한참 재판이 진행중일 때라 은닉재산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예금보험공사 발표는 이래도 들어올 거냐는 정부의 김우중씨에 대한 경고처럼 보였다.

그 무렵 김우중씨 는 <한국경제신문> 조규제 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재판에 영향을 줄 것 같아 그동안 귀국을 미뤄왔지만 2심 재판이 끝나는 대로 귀국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재판은 이듬해까지 기약없이 늘어졌고 김우중씨 귀국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지난해 11월 재판이 끝나고 대우 경영진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우중씨는 귀국을 앞두고 무엇인가 요구조건을 내걸었고 그게 맞지 않아 귀국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정부대로 김우중씨가 몰고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그 팽팽한 줄다리기가 끝나지 않으면 김우중씨는 돌아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우중씨는 그동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경제자문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김우중씨는 지난해에도 몇차례 평양을 다녀갔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 고위층에 선이 닿아 있는 정보기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때 신의주 경제특구의 장관 후보로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과 함께 김우중씨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우중씨는 일찌감치 지난 1996년 북한의 삼천리총회사와 손잡고 남포공단에 민족산업총회사라는 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김우중씨는 그때도 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북한을 안방 드나들듯 넘나들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정부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에서는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김우중씨가 북한에 경제부총리로 간다는 소문도 그런 맥락에서 흘러나왔다. 소문은 이렇다. 김우중씨 는 해외 어딘가에 막대한 자금을 숨겨놓았다. 어차피 우리나라에 가져와봐야 쓸 수 없는 돈이다. 귀국하면 모든 재산을 털어 24조원이 넘는 추징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숨겨놓은 돈이 얼마가 됐건 그 돈을 쓸 수 있는 데는 세계를 통털어 북한 밖에 없다. 김우중씨로서는 명예회복도 할겸 못이룬 꿈도 이룰 겸 북한으로 건너가 경제부총리를 맡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셈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양문수 북한학대학원 교수는 “남북경제협력에 가장 먼저 앞장섰던 김우중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 수 있다”면서 “양빈 장관 사례에서 보듯 개혁 개방을 이끌어갈 국제적 인물이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김우중씨가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연철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외자유치나 개방정책에 목을 매는 북한이 김우중씨 같이 말 많은 사람을 경제부총리로 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 사실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김우중씨가 물밑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저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정부는 그동안 김우중씨를 붙잡을 수 있는데도 내버려두고 있고 정작 김우중씨가 귀국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귀국을 막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씨는 나름대로 북한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유럽 각국을 오가면서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2001년 3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있던 무렵 서강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 대학원 입학식에서 “김우중 전회장은 분식회계도 하고 이중장부도 작성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김 전회장을 변명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우중씨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태도를 좀더 지켜보고 행동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환 기자 jlee@economy21.co.kr


김용옥과 김우중의 오랜 인연.

김우중씨를 만나고 온 김용옥 기자는 누구인가.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던 무렵부터 학계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대중들 앞에 나타난 건 1999년 에 서 ‘노자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방송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거침없는 독설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날카로운 풍자로 가득찬 그의 강의는 엄청난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 그가 <문화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2일부터다. 이번 인터뷰는 그의 첫 특종인 셈이다.

김용옥 기자와 김우중씨의 첫 만남은 김 기자가 고려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원광대학교 한의학과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던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우중씨는 원광대학교에 강연하러 들렀다가 우연히 김 기자를 만나 아프리카 여행에 동참해줄 것을 제안한다. 김 기자는 이 여행이 퍽 감격스러웠던 모양이다. 여행중에 김우중씨와 나눴던 대화를 모아 <대화>라는 책도 냈다. 이 책에서 김 기자는 “김우중, 김우중이 야말로 바로 성인이다”고 부르짖는다. 김 기자의 이런 태도는 이 책의 다음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 “난 날 못 알아보는 자들을 경멸하는 엘리티즘이 뼈속까지 깊게 물들여져 있다. 그리고 날 알아보는 자들에게 감격하는 치정주의가 있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김 기자와 김우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김용옥이 김우중을 우러러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어린애들이 맛있는 것 사주는 어른을 좋아하는 이유와 똑같다. 그 아저씨가 어떤 아저씨인지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맛있는 걸 사줬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때나 12년이 지난 지금이나 김 기자가 김우중씨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그렇다치고 기자 경력이 짧아서일까. 김 기자는 기자가 김우중씨를 만나면 마땅히 물어야할 몇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빼먹었다. 모처럼의 인터뷰 기사였지만 김우중씨를 둘러싼 의혹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김우중의 변명.

과연 대우의 세계 경영 전략은 망할 수밖에 없는 사업모델이었을까. 370개 해외법인과 1040개 지사를 거느리고 전세계를 호령하던 대우는 결국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김우중씨는 아직도 대우가 운이 나빠서 몰락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우가 부딪힌 첫번째 문제는 역시 IMF였다. 환율과 금리가 갑자기 뛰어오르면서 대우가 해외 법인들에 쏟아부은 빚 11조원은 몇달 사이에 26조원까지 늘어났다. 아무리 정부가 뒤를 봐준다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도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1998년 결국 대우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해 7월 단기 기업 어음 발행 한도를 제한한데 이어 10월에는 회사채 발행 한도까지 제한해 쓰러져가는 대우의 숨통을 졸랐다. 벼랑끝에 몰린 대우는 그해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삼성으로서는 부실덩어리일 게 뻔한 대우전자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대우의 무리한 성장전략은 유동성 위기와 함께 벽에 부딪혔다.

두번째 문제는 잘못된 시장예측이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만든 인도나 동유럽의 공장들은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 갚아야 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데 현금이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우는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이듬해 7월 대우는 고민 끝에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을 내놓는다. 김우중씨 의 경영권과 재산을 모두 내놓을 테니 대신 급한 빚을 막을 수 있도록 4조원을 지원해달라는 또 한번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숨통을 죄던 6조원의 초단기 기업어음도 어렵사리 만기를 6개월 더 연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발악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껐을 뿐 근본적인 대안은 못됐다. 이때쯤 대우의 빚은 이미 100조원에 가까와지고 있었다.

긴급 지원된 4조원은 언발에 오줌 누기 마냥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김우중씨는 금융기관들 탓을 한다.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선진국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다가 후진국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는데 재미를 붙이다가 아시아 국가들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같이 위기를 맞게 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 외환위기만 없었으면, 또는 정부가 좀더 도와줬더라면, 그런 가정들은 모두 부질없다.

이정환 기자 jlee@dot21.co.kr


대우그룹 패망일지.

1998년
7월22일 금융감독위원회 초단기 기업어음 발행한도 규제
10월28일 금융감독위원회 회사채 발행한도 규제
10월29일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노무라 보고서 발간
12월7일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교환 제안

1999년
4월19일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매각 등 구조조정 계획 발표
7월19일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
7월25일 김우중 회장, “자동차 정상화 후 퇴진” 선언
8월26일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 돌입
9월6일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대우통신 등 3개사 은행관리 개시
11월1일 김우중 회장 및 12개 계열사 사장단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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