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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회피지역, 세금 없는 투기자본 천국.

Written by leejeonghwan

May 21, 2005

이중과세 방지협약이라는 게 있다. 기업이 외국에 나가서 사업을 할 때 어느 한쪽 나라에만 세금을 내도록 하는 협약이다. 기업이 원래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내는 방법이 있고 사업을 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나라에 내는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는 첫 번째 방법을 따른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기업이 말레이시아에 가서 돈을 벌면 우리나라에 세금을 낸다. 말레이시아의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면 역시 자기들 나라에 세금을 낸다. 우리나라는 1982년 말레이시아와 이중과세 방지협약을 맺었다.

문제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이라는 지역에 있다. 말레이시아는 1985년 이 지역을 투자자유지역으로 지정하고 파격적인 세금 혜택을 제공하면서 외국 기업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곳에서는 일정 정도의 수수료를 제외하고는 세금을 전혀 내지 않을 수 있다. 라부안은 이른바 조세회피지역이다. 이중과세 방지협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말레이시아 기업에 세금을 매길 수 없는데 이 기업 본사가 라부안에 있다면 이들은 말레이시아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라부안은 인구 2만명에, 면적은 98㎢으로 우리나라 여의도의 10배 정도 크기 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다. 1주일이면 회사를 하나 만들 수 있는데 비용도 1만 달러밖에 안 든다. 이곳에는 들어서 있는 수천개의 회사 가운데 상당수는 서류로만 존재하는 이른바 페이퍼컴퍼니다. 이곳에 회사를 만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업을 하면 우리나라와 말레이시아 어느 곳에도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그야말로 조세 천국인 셈이다.

제일은행 주식을 스탠더드챠터드은행에 넘겨 1조18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던 뉴브리지캐피털도 라부안의 고객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 같으면 주식 양도세로 30%를 내야하지만 라부안은 이같은 자본이득에 대해서는 전면 면세를 해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법인세도 없다. 우리나라 기업이라면 순이익의 25%를 법인세로 내야 하는데 라부안에서는 순이익의 3% 또는 2만링깃 가운데 적은 금액을 선택해서 낼 수 있다. 2만링깃이면 우리나라 돈으로는 600만원도 채 안된다.

제일은행의 대주주였던 회사의 이름은 정확히 KTB뉴브리지유한회사다. 이 회사는 케이먼군도에 있는 KFB케이먼홀딩스컴퍼니의 100% 자회사다. 케이먼군도도 역시 조세회피지역이다. 이 회사는 다시 미국의 KFB뉴브리지인베스트먼터LP의 100% 자회사다. 이 회사의 대주주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텍사스퍼시픽이나 블럼캐피털파트너스, 일본의 소프트방크 등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만약 미국 기업이 직접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돈을 번다면 미국에 세금을 내는 게 맞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이중과세 방지협약에 따라 원래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만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와 협약을 맺지 않은 나라의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돈을 번다면 그 기업에 세금을 매길 것이냐 말 것이냐는 건 우리나라 정부가 우리 기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미국의 기업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면 미국은 세금을 받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같은 경우다. 우리나라가 말레이시아와 맺고 있는 이중과세 방지협약은 라부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라부안을 거치면 이익이 20% 이상 늘어날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라부안은 한국 투자의 교두보로 자리잡아왔다. 뉴브리지캐피털뿐만 아니라 한미은행 주식을 사고팔아 6617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던 칼라일도 라부안을 통해 들어왔다. 외환은행의 대주주 론스타는 버뮤다를 통해 들어왔다.

이처럼 조세회피지역을 몇단계 거치면 이들은 어느 나라에도 세금을 내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미국에 있는 모회사는 조세회피지역에 있는 자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을 이익으로 가져오지 않고 대여금 형태로 들여온다. 자회사가 모회사에 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면 모회사나 자회사나 이익이 줄어들면서 세금은 내지 않지만 대여금과 이자를 주고받으면서 두 회사 모두 돈이 넘쳐나게 된다.

결국 돈을 벌기는 버는데 그 이익이 조세회피지역의 자회사에 쌓이고 모회사의 이익으로 잡히지 않는다. 모회사의 이익을 최대한 줄이면서 세금을 피해나가는 수법이다. 조세회피지역은 금융세계화 시대, 투기자본이 이익을 빼돌리는 가장 확실한 통로다. 이런 시스템은 이미 제도화돼 있다. 자본은 이미 국경을 초월한지 오래다. 기업의 이익은 이제 사회에 환원되지 않는다.

외환은행의 대주주로 있는 론스타의 사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론스타는 2001년 6월 6332억원에 사들인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를 9000억원에 매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억원을 훨씬 웃도는 시세차익을 남긴 셈인데 세금은 한푼도 내지 않았다. 물론 외국 회사도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을 사고 팔 때는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론스타는 부동산이 아니라 주식회사 스타타워의 주식을 넘기는 방식으로 세금을 피해나갔다. 론스타는 수많은 자회사를 두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자회사는 벨기에에 있다. 우리나라가 이 나라와 맺은 조세협약에 따르면 주식 양도차익에 대해서는 거주지 국가에서 세금을 매기도록 돼 있다. 벨기에에 있는 자회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1992년 자본시장 개방 이후 올해 2월까지 조세회피지역을 통해 들어온 외국 자본은 모두 11조1534억원 규모에 이른다. IMF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하면 100배 이상 늘어났다. 전체 외국인 투자 규모 가운데 조세회피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1% 미만에서 1999년에는 2.26%, 2000년에는 28.1%로 늘어났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칼라일과 론스타 등 투기자본에 대한 세무조사에 나선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투기자본의 횡포가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만큼 사회의 비판여론도 거세다. 국내 사모펀드가 활성화되면서 외국 자본에 질질 끌려다닐 이유도 없어졌다.

국세청은 이번 세무조사를 시작하면서 고정사업장 이론을 근거로 들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수백명의 직원이 근무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면 그건 고정 사업장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이를테면 뉴브리지캐피털의 경우 회사가 라부안에 있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페이퍼컴퍼니일뿐 실제 사업을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이다.

물론 고정사업장이라는 개념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른바 연락사무소라는 개념과 배치되는데 단순한 시장조사와 자산구입 등 보조적 활동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판매나 부품공급, 고객관리 등을 한다면 고정사업장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문제는 제조업체가 아니라 금융자본의 경우다. 연락사무소냐 고정사업장이냐를 놓고 논쟁이 본격화될 수도 있다.

논란이 많은 고정사업장 이론보다는 수익적소유자 이론을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세연구원 안종석 연구위원은 “조세회피지역을 통해 들어온 외국자본에 대해서는 이익이 발생한 나라에서 세금을 매길 수 있다는 게 세계적인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미 일본의 경우 조세협약을 개정해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을 외국자본이 인수할 경우 세금을 매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론스타재팬에 1400억원의 세금을 추징한 바도 있다. 또 캐나다 기업들의 경우 일본 주식을 사고팔 때 양도차익에 따른 세금을 일본에 내도록 돼 있다.

투기자본의 횡포로 몸살을 앓던 영국도 횡제세를 부과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칠레 등도 주식 양도차익에 따른 세금을 수익을 내는 나라에 내도록 하고 있다. 이런 협약들은 결국 정부와 정부가 협상과 힘의 논리로 풀어야한다.

국세청은 한발 더 나가 말레이시아와 조세협약 개정을 추진하고 라부안을 이중과세 방지협약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 협약을 맺을 때는 라부안이 조세회피지역으로 지정되기 이전이었고 조세회피지역과는 이중과세 방지협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말레이시아는 라부안을 국제금융도시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는데 설득이 결코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국세청이 의욕적으로 칼을 뽑아들기는 했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많다. 정부의 의지도 의심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은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최고경영자 초청회의에서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이윤을 얻어 국부가 유출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는데 이는 틀린 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정부 내에서 ‘국부유출’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한술 더 뜬다.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외국자본과 국내기업을 차별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꼬리를 내렸다.

두 사람 모두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윤증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는 좀 걱정스럽다. 윤 위원장은 “자본을 국적으로 따지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으며 오히려 외국자본이 정당한 영업활동을 통해 투자자본의 회수를 도모하는 것에 대해 인정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론스타와 칼라일, 뉴브리지캐피털 등 투기자본의 ‘정당한 영업활동’과 금융세계화가 가져온 폐해를 묵과하는 태도였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정종남 국장은 투기자본의 문제를 단순히 조세회피의 문제로 축소시켜 보지 않는다. 자본의 국적 보다는 국적을 떠나 자본의 투기적 속성에 주목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투기자본감시센터는 국내 사모펀드의 움직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투기자본은 기업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투자와 고용을 창출하기 보다는 단기 시세차익을 올리고 빠지는 게 이들의 최대 목표다. 세금을 잘 내고 잘 안내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기업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기업의 미래를 부정한다.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 국장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본다.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로 풀 일이 아니라 자본 전반에 대해 투기적 횡포를 규제하고 특히 주주가치 극대화 기조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부는 아직도 동북아 금융허브니 개방형 통상국가니 뜬구름 잡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금융세계화에 편승해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2000년 관세청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840개 기업이 라부안에 현지법인이나 지사를 두고 있다. 8310억원 상당의 불법 외환거래가 적발됐고 조세회피지역을 넘나드는 외환거래도 2억5000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조세회피가 문제라면 굳이 론스타나 칼라일을 문제삼을 게 아니라 우리나라 자본도 바깥에 나가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세회피지역은 자본이 국경을 넘어 경제를 약탈하고 이익을 축적해 나가는 금융세계화 구조의 핵심에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세계 모든 나라들이 금융세계화의 피해를 보고 있다. 이제 자본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이익을 얻는 나라도 있겠지만 멀리 내다보면 결국 성장은 자본의 몫일뿐이다. 세계적으로 민중과 노동자 계급의 삶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민중 연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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