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경제와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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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1일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때 원달러 환율은 1056.0원이었다. 환율은 한 달 뒤인 12월 23일 1962.0원까지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른다. 1990년대 내내 환율이 600원에서 800원 사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돌아보면 정말 엄청난 변화였다.

환율 문제는 간단하면서도 늘 헷갈리는 부분이다. 환율이 1000원에서 2000원으로 뛰면 지금까지 1000원에 팔던 물건을 2000원에 팔 수 있게 된다. 같은 물건을 팔고 물건값을 두 배로 받는다면 이익은 두 배 이상 늘어난다. 물론 수출이 신바람 나는 만큼 수입은 더 어려워진다. 1000원에 사들여오던 물건을 이제 2000원이나 줘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마리 토끼를 같이 잡을 수는 없다.

1997년 12월, 2000원 언저리까지 뛰어올랐던 환율은 1999년 1월 1200원 밑으로 떨어졌고 1200원과 1400원 사이를 오가다가 4월 들어 급기야 1000원 밑으로 무너진다. 7년 5개월 만에 IMF 외환위기 무렵 환율로 돌아간 셈이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기업들은 그만큼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다. 이를테면 2000원에 팔던 물건을 이제 1000원 주고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놀라운 수출 실적을 기록했던 건 우리 기업들 경쟁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높은 환율 덕분이다.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 산다면 당연히 환율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고 볼 수 있다. 환율을 계속 올려서 더 많이 수출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출로 돈을 벌어들이면 그만큼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된다. 당연히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 물가가 오른다는 건 그만큼 화폐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환율은 더 오른다. 결국 물가가 오르면서 환율이 따라 오르고 다시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가격도 그만큼 오르게 된다. 수입 가격은 역시 물가를 끌어올린다. 고정 수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진다. 수출 기업들은 돈을 벌겠지만 그만큼 내수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수출 기업들이 수출로 재미를 보는 만큼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은 죽어난다. 기업은 돈을 버는데 가계는 가난해진다.

환율이 떨어질 때는 거꾸로 생각하면 된다. 수입가격이 낮아지면서 물가가 안정되고 가계 지출이 늘어나면서 내수 산업이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수입이 늘어나는 만큼 수출이 줄어들고 국제 경상수지는 적자가 된다. 환율이 1000원 밑으로 떨어지면서 수출 기업들은 비상이 걸린다. 가격 경쟁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격이 아니라 품질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수출과 내수, 어디에 비중을 두느냐가 관건이다. 수출을 살리려다 보면 내수가 죽고 내수를 살리려다 보면 수출이 죽는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우리나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높은 환율은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율은 단순히 수요 공급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마냥 높일 수도 없고 마냥 낮출 수도 없다. 적정 환율을 찾고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환율 문제에서 주목할 부분은 미국과의 관계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달러를 만들어 내는 나라다. 미국이 해마다 엄청난 적자를 내면서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자가 나면 국채를 발행해서 빚으로 때우면 된다. 그 국채를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이 앞다투어 사주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적자를 우리가 메워주고 있는 셈이다.

만약 환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미국 국채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진다. 미국 입장에서는 환율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빚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 국채를 들고 있는 우리나라는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환율을 방어하려면 미국 국채를 계속 사들여야 한다. 돈을 빌려주고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으니 돈을 계속 더 빌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IMF 외환위기 때도 그랬지만 갑작스럽게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갈 경우 우리나라는 돈을 쌓아두고도 지급 불능 사태를 맞는 수가 있다.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달러화로 바꿀 수 없다면 원화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대외 채무나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 자금만큼 외화 자산을 준비해 두는데 그걸 외환보유액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은 엄청난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적립해 두고 있다. 2005년 4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무려 2063억8000만 달러에 이른다. 세계 4위 규모다. 1997년 12월, 204억 달러에서 무려 10배 이상 늘어났다. 환율 1000원을 기준으로 하면 206조원을 웃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 가운데 달러 자산은 1600억 달러 정도, 특히 미국 국채가 70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게 일반적인 추산이다. 전체 미국 국채의 4% 규모다.

미국 국채를 산다는 건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로서는 그게 외환위기를 피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바야흐로 금융 세계화 시대, 기축 통화를 만들어 내는 미국은 그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그렇게 아시아 나라들에서 빌린 돈으로 장기 호황을 이끌어 왔다. 그 돈으로 전쟁도 일으켰다.

미국 경제는 빚으로 굴러간다. 수출이 계속 줄어들고 수입만 늘어나는데도 빚을 늘려가며 버티고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일찌감치 무너졌겠지만 미국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다. 미국 국민들은 저축도 하지 않는다. 저축률이 1% 수준밖에 안 된다. 미국은 하루 평균 20억 달러, 우리 돈으로 2조 원을 외국에서 빌린다. 지난해의 경우 세계 저축의 80%가 미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미국 경제는 이미 빚을 내서라도 돈을 뿌리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시스템이 돼 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수입 물건을 사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 수출기업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물론 마찬가지다. 미국 내수에 따라 세계 경제가 흔들리는 셈이다. 그래서 다들 미국에 돈을 빌려주고 미국은 그 돈으로 그 나라들에게 물건을 산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언젠가 결국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당장 우리나라든 어디든 미국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미국 경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미국 국채가 쏟아져 나오면 달러가치는 폭락한다. 달러 가치가 폭락하면 미국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늘어나면 자칫 세계 경제가 동반 몰락할 가능성도 있다.

1985년에도 그런 위기가 한번 있었다. 그때 미국은 일본을 설득해 일본 엔화의 환율을 절반으로 낮추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게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하루 아침에 일본 상품의 가격이 미국에서 두 배로 뛰어올랐고 미국이 일본에 진 빚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은 그 후유증으로 10년의 장기불황에 빠져든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03년 기준으로 2조60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국내총생산 대비 비율은 6.3%로 플라자 합의 때 3.5%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머지않아 또다른 플라자 합의가 나올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20년 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미국의 빚을 떠안지 않으면 세계 경제가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희생양으로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중국은 달러 환율을 8.28위엔으로 일정하게 묶어두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흔들리면서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데 중국은 그런 위험에서 빗겨나 있다. 환율이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중국에게 인위적으로 환율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1620억 달러, 미국의 무역 적자 6171억 달러의 27%를 차지한다. 미국 상원의회는 올해 4월, 중국이 위엔화를 절상하지 않으면 보복 관세를 물리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중국이 환율을 낮춘다고 과연 미국과 세계 경제의 위기가 해결되느냐는 부분이다.

1985년과 달리 지금의 위기는 중국이든 어느 다른 나라든 일방적인 희생으로 해결될 위기가 아니다. 미국이 저축도 없이 지나치게 많은 소비를 해왔기 때문에 만들어진 위기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이 그런 미국의 빚을 지나치게 많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위기다. 미국의 적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이제 그 빚을 더 받아줄 데가 없다는 게 위기의 본질이다.

미국이 중국에 위엔화 절상을 요구하는 것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 또다른 플라자 합의를 요구하거나 통상 압력을 강요할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군사력을 동원할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지금 미국의 위기는 심각하다. 그나마 미국이기에 이만큼 버틸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진작에 외환위기를 맞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어떤 경우든 미국은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에 맞물려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동안 미국은 세계의 소비시장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세계는 미국의 소비에 의존해 성장해 왔다. 분명한 것은 그런 성장이 이제 한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한계를 바로 보지 않고는 세계 경제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의 몰락 이후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 미국이 무너진다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다.

해법은 무엇일까.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나라는 미국 국채를 내다 팔아야 한다. 당장 외환보유액을 유지해야 한다면 미국 국채를 팔고 유로화나 다른 자산으로 옮겨 타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만약 미국이 가라앉는 배라면 미국과 운명을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 수출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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