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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과 광주민중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Written by leejeonghwan

May 18, 2005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총 맞고도 한참 살아서 말도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보니까 옆구리에 총을 맞고는 ‘어이쿠’하고 쓰러져서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리더라고요. 그때가 새벽 다섯시쯤 됐나. 어슴푸레 동이 틀 무렵이었죠.”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금남로 도청 2층 회의실, 이양현이 지켜봤던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윤상원은 바로 숨을 거둔다. 윤상원이 죽고 난 뒤, 한동안 공수부대와 대치하던 이양현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지만 항복이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했다. 이양현을 비롯해 살아남은 시민군들은 모두 잡혀가 호된 고문을 받고 투옥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기록과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날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남아 목숨을 걸고 계엄군과 맞서 싸웠다. 이 최후의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윤상원이다. 1950년생.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들불야학 강학. 그때 나이, 만으로 딱 서른이었다.

윤상원 열사의 흔적을 찾아 기자는 5월 광주를 다시 찾았다. 우리는 늘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거나 그들의 죽음 앞에 분노하기만 했을 뿐 그때 그 처절하고 치열했던 광주의 정신을 제대로 고민하거나 반성하지 못했다. 2005년 5월에 우리는 25년 전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오늘에 되살릴 것인가가 화두다. 살아남은 자들을 만나 5월 광주와 윤상원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끌어 모아봤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윤상원, 그가 없었다면 5월 광주도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싸우지 않았다면 비슷한 무렵의 사북항쟁이나 부마항쟁처럼 광주 민중항쟁도 쉽게 잊혀졌을 거라는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윤상원이 그 핵심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광주 외곽, 광산구 임곡동에 있는 그의 생가는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다. 윤상원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올 여름 촬영을 앞두고 있다.

시인 박노해가 1989년에 쓴 ‘윤상원 평전’에 따르면 윤상원은 시민군 지도자를 넘어 혁명투사였다. 박노해는 이 평전에서 윤상원이 1980년 5월 18일 이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 두고 광주에 내려가 공장에 위장 취업한 사실, 들불야학에서 노동자 계급 의식화에 앞장서고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등을 미뤄 그가 노동 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 혁명투사였다고 주장한다.

“윤 열사는 신 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성과 파쇼 권력의 살육성의 본질을 투철히 자각하고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인 무장 봉기를 대비하고 과감하게 지도해 나가는 봉기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무장력으로 국가 권력을 손에 움켜쥠으로써 민중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조직화하는 봉기에 의해서만 오늘의 투쟁이 완성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삶입니다.”

박노해는 5·18을 ‘광주 무장봉기’라고 부른다. 그가 이 평전을 썼던 1980년대 말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았겠지만 그는 윤상원을 체제 전복을 꿈꾸는 혁명투사로 그리고 있다. 5·18을 일주일가량 앞둔 5월 9일, 윤상원은 운동권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계엄이 확대될 경우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노해가 윤상원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부분 때문이다.

“‘노동자 총파업으로 군사 독재를 타도하자’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총파업만으로 국가 권력은 타도되지 않습니다. 우리 노동자 계급은 다른 투쟁 수단, 즉 무장 투쟁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일상 투쟁 속에서도 끊임없는 대비를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자는 윤상원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수소문해서 만나봤다. 먼저 임낙평. 윤상원의 대학교 후배고 함께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도청에 없었다.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에게 채무의식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5·18 이후 전남대학교 사회문제연구소에서 일했고 지금은 광주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있다. 1991년, 윤상원의 평전으로 ‘들불의 초상’을 쓰기도 했다. 그는 박노해와 시각이 다르다.

“그때는 노동운동이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운동판도 좁았고 다들 독재에 맞서 사회 민주화를 쟁취하는 게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했죠. 윤상원씨를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건 같이 활동했던 내가 잘 압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임낙평은 1980년 광주에는 노동운동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공장이 없고 노동자가 없는데 어떻게 노동운동이 가능했겠느냐는 이야기다. 다만 1980년은 세계적으로 독재가 무너지던 무렵이었다. 이란과 알제리, 니카라과 등에서 잇따라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임낙평은 그때 광주에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민주주의가 온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10일만 더 버티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5·18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윤상원의 대학 선배, 김상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학생운동으로 수감된 전력이 있었던 그는 5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일찌감치 경찰에 잡혀 들어갔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는 5·18을 프롤레타리아나 노동자 계급이 주도했다고 말하는 건 ‘소설’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정확히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다.

“그때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상당수는 프롤레타리아 보다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버티지 못하고 올라왔는데 도시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를테면 부랑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자리라고 해봐야 가내수공업 수준이었고 노동자 계급 자체가 형성되지 않을 때였죠.”

김상윤이 운영했던 사회과학 전문 녹두서점은 5·18 때 항쟁 지도부의 거점 역할을 했다. 김상윤이 잡혀간 뒤 윤상원은 이 곳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투사회보’를 제작해 여론을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모든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로 일관하던 그때 광주에서 ‘투사회보’는 유일하게 언론 역할을 했다.

5월 24일에 발간된 ‘투사회보’ 7호는 전두환의 퇴진과 계엄령 해제, 민주인사를 중심으로 구국내각을 구성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중고등학생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고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먼저 발포하지 않도록 하는 등 시민들에게 질서와 치안유지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항쟁 지도부는 사실상 임시 자치정부 역할을 했다. 수천장의 ‘투사회보’가 뿌려졌고 21일 도청 앞 집회에는 10만 군중이 몰려들었다.

기록과 증언을 모아보면 윤상원은 대학교 때부터 김상윤 등에게 체계적인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은행에 취업했던 그는 반년도 안돼 돌연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그러나 그의 공장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두달 만에 그는 신용협동조합으로 옮겨가고 들불야학에서 강학 활동을 시작한다.

윤상원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보는 걸 반대한다. 윤상원의 사상적 바탕이 됐던 김상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나 같이 윤상원은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맥락에는 윤상원을 혁명투사로 보는 시각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다. 운동판에 뛰어들었지만 주변부에 머물렀고 그의 사상은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발간된 ‘시대의 불꽃, 윤상원’을 썼던 소설가 윤동수도 박노해가 쓴 평전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살아 있었으면 나중에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는 그렇지 않았고 그럴 수 있는 시대적 상황도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사상 문제로 사형까지 당하는 서슬 퍼런 세상이었다.

“윤상원을 깎아 내리자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겁니다. 그때 도청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윤상원 말고는 대졸 출신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고아원 출신이거나 부랑자들이었어요. 만약 윤상원까지 빠졌으면 5·18이 그냥 부랑자들의 난동 정도로 끝나게 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윤상원이 그때 그런 판단까지 했다고 봅니다.”

정재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도 역시 들불야학의 후배였고 지금은 윤상원 민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윤상원의 생가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단체가 여기다. 정재호는 5·18을 산업사회의 모순이 폭발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 무렵 사회운동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정치 투쟁과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의식화 투쟁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상원이 형은 두번째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사회주의자였느냐 공산주의자였느냐 따지기 보다는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5·18이 터진 겁니다.”

정재호는 5·18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상황에 휩쓸린 이른바 ‘상황인자’였다고 지적한다. 군인들의 총칼 앞에 이웃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떨쳐 일어났지만 딱히 정치적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정재호가 보기에 그래서 윤상원은 특별하다. 윤상원은 5·18을 조직적인 투쟁으로 이끌었던 5·18의 정신이었다.

그해 5월 21일, 공수부대가 무차별 총격을 퍼붓고 퇴각한 뒤 광주는 잠깐이나마 해방 공간이 됐다. 금남로 도청에 모여든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할 것이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울 것이냐의 논쟁이 벌어졌다. 항쟁 지도부 역할을 했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이대로 항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굳혔다. 도청을 넘겨준다는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남아서 계엄군과 맞서 싸워야 했고 죽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했다. 그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에 들이닥쳤는데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가 1980년 광주를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상원이 형을 비롯해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때문에 5·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겁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말입니다.”

“도청에 도착하니까 상원이 형이 무기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우리를 본 상원이 형이 깜짝 놀랬다. 우리들은 나이가 어려서 군대를 가지 않았던 상태였다. 제일 큰 형님이 어린 동생들에게 말하듯이 상원이 형이 “너희들 총을 사용할 수 있어?”하면서 여러 번 확인하더니 걱정스럽고 불안스러운 듯이 “이놈들은 안 되는데”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장난을 쳤다. “괜찮아요. 형님, 내가 얼마나 총을 잘 쏜다고요.” 내 말에 상원이 형은 웃으면서도 쉽게 총을 건네주지 못하였다. ‘어린 것들 총을 주었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조심해라”하고 마지막 말을 하고 총을 주었다.
나명관(당시 용접공, 들불야학 학강. 20세), 5·18 증언자료집 가운데.

윤상원은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고 있었다. 위원장도 있었고 상황실장도 있었지만 위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윤상원이었다. 윤상원은 5월 28일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을 연다. ‘볼티모어 선’의 기자, 브래들리 마틴은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브레들리 마틴은 5·18 이후에도 광주를 두 번이나 더 찾았다. 올 때마다 그는 임곡동까지 찾아와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을 만났다. 일제 시절 소학교에서 일본 말을 배웠던 윤석동은 일본 특파원으로 있었던 마틴과 어설프게나마 일본 말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마틴이 내 손을 꼭 잡으면서 하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상원이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알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상원이가 폭도니 빨갱이니 하고 내몰리던 그때, 그 사람 말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나는 우리 상원이가 옳은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윤상원과 함께 도청을 지켰던 이양현은 윤상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살아남은 그는 중견 건설회사의 부사장이 돼 있었다.

“윤상원씨는 마치 5월 광주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판소리를 곧잘 하고 평소에는 그렇게 순박하고 소탈했던 사람이 그때 도청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논리정연하고 단호하고 상황 판단도 빨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등학생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너희가 역사의 증인이 돼 줘야 한다면서 말이죠.”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상호는 시위 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가 어느 가정집에 실려가 이틀 만에 깨어났다고 했다. 그는 지금 들불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윤상원을 비롯해 박관현과 박기순 열사 등 들불야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신기하게도 머리가 텅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어요.”

김상호는 길거리에서 소금물에 적신 주먹밥을 나눠주던 시장 아주머니들을 기억한다. 칼에 찔리거나 총을 맞고 쓰러져 소리 지르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거리로 불러냈을까. 피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흥분하기보다는 침착했고 질서정연했다. 광주 전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그때 광주 사람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사상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군인들과 맞섰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밥을 해 나르거나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데 앞장섰다. 헌혈을 하려고 긴 줄을 서기도 했고 기꺼이 ‘개죽음’을 자처하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단순히 민주화의 열망이나 계급 혁명의 차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미국 웬트워스 대학의 조지 카피아피카스 교수는 1999년 5·18 학술강연회에서 이른바 ‘광주 코뮨’을 설명하기 위해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수백만의 일상적인 민중들이 스스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직관적으로 믿으면서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들어온다. 이때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들이 부정됨과 동시에 보편적인 인류적 관심이 전면화 된다. 이런 에로스 효과는 단순히 마음의 행위도 아니고 의식적 요소에 의해 의도되는 것일 수도 없다. 오히려 에로스 효과는 수백만의 일상적인 민중이 역사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는 만큼 스스로 당당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민중적 혁명운동들을 포함한다.”

카피아피카스는 ‘민중들의 직관적 동일시’와 ‘집단적 힘에 대한 믿음’에 주목한다. 일상적 민중들이 보이는 자연발생적 행동들이 혁명으로 이어지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서는 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혁명은 의식적 요소나 혁명 정당에 의해 의도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자유를 향한 본능적 욕망이 집단적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카피아피카스는 한국에서 ‘광주 코뮨’이 프랑스의 파리 코뮨이나 러시아의 포템킨 전함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윤한봉은 5·18의 정신을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으로 풀이한다. 그는 수배를 피해 미국에 망명했다가 1993년, 12년 만에 돌아왔다. 남은 생애를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겠다고 했다. 지금은 민족미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때 돌멩이 던지던 고등학생들이나 밥해 나르던 시장 아줌마들, 총 들고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 죽었거나 살아남았거나 광주 사람들 모두가 5·18의 주역입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고 민중이 넓게 하나 되는 세상, 그게 바로 5월 광주의 정신입니다. 그게 바로 개혁과 진보고 통합과 통일의 정신입니다.”

윤상원이 사회주의 혁명가였느냐 아니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5·18의 성격을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윤상원은 분명히 5·18을 민중항쟁과 봉기로 조직하고 방향을 세운 핵심 인물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광주를 지켜냈다. 그러나 윤상원 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5·18을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해 5월 광주, 수많은 민중들의 목소리를 놓치게 될 우려가 있다.

광주는 더 나은 사회의 열망, 개혁과 진보, 통합과 통일의 정신이 민중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5·18은 윤상원 같은 뛰어난 혁명투사 뿐만 아니라 그날 거리로 뛰쳐나왔던 민중들 모두의 승리였다.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의 희생은 역사를 바꿔놓았고 여전히 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해 5월 광주의 정신을 끊임없이 현재에 되살려야 한다. 그게 5·18이 2005년의 우리에게 주는 화두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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