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여배우를 소비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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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여자친구가 어린 남자애로 환생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그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이은주는 인우의 죽은 여자친구 태희로 나온다. 태희는 영화가 시작하고 20분도 안돼서 죽는다. 태희는 예쁘긴 하지만 수동적이고 마치 소품처럼 영화의 흐름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영화는 철저하게 인우의 관점에서 흘러간다.

‘연애소설’에서 이은주는 비를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수인으로 나온다. 수인은 친구 경희가 죽고 난 다음 연락을 끊고 사라진다. 수인과 경희는 지환을 좋아하면서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들을 찾아 헤매는 건 지환이다. 수인은 마냥 기다리고 지환을 만나자 마자 죽는다. 다만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결말을 위해 수인은 죽는다.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영신은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우익 청년들의 총에 맞아 죽는다. 약혼자 진태는 영신이 다른 남자랑 놀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죽도록 내버려둔다. 이 영화에서 영신은 행복한 과거의 상징으로 잠깐 등장한다. 전쟁터로 떠난 약혼자를 위해 몇번 울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고생 하다가 결국 억울하게 총에 맞아 죽는다. 카메라는 쓰러진 영신을 오래 비추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 ‘오! 수정’에서 이은주는 재훈과 영수 사이를 오가는 연인, 수정으로 나온다. 첫 섹스에서 수정의 처녀막을 확인한 재훈은 감격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이 영화는 위선을 거둬내려고 노력하면서 주인공들의 위선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 위선의 이면에서 수정은 상대적으로 약자고 피해자다. 그게 현실이거나 현실에 가깝기 때문에 이 영화의 폭력적인 시선은 거부감 없이 용인된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은주의 마지막 영화, ‘주홍글씨’는 더욱 암담하다. 기훈의 매력적인 정부, 가희를 연기하기 위해 이은주는 과감한 노출을 감당해야 했다. 이은주의 노출은 가희의 성적 매력과 기훈의 외도를 설명하고 관객들의 눈 요기를 충족시켜주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가희는 기훈과 여러차례 섹스를 하고 승용차 트렁크에 갇혀서 발가벗고 온통 피를 뒤집어 쓴 채로 어이없이 죽는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은주는 한번도 주인공이 아니었다. ‘연애소설’의 주인공은 태희가 아니었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은 영신이 아니었다. ‘오! 수정’의 주인공은 수정이 아니었다. ‘주홍글씨’의 가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여주인공이었을뿐 이상하게도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들을 너무 빨리 죽거나 사라졌고 그들을 기억하는 건 늘 남자 주인공의 몫이었다.

그런 이은주가 처음으로 오로지 자신을 위해 죽었다. 그의 절망을 이해할 것도 같지만 우리에게 그는 이렇게 어떤 조작된 이미지로만 남았다. 그 이미지는 소비되고 착취되고 버려진다. 어쩌면 그는 죽어서야 진짜 주인공이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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