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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반대 투쟁 330일째, 금강화섬의 겨울.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16, 2005

텅 빈 공장에 깃드는 저녁 노을은 을씨년스럽다. 어둑어둑할 즈음해서야 창 밖에서 발전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조금 뒤에 노동조합 사무실에도 불이 들어왔다. 금강화섬 노조는 그렇게 전기도 끊긴 공장을 1년이 다 돼 가도록 날마다 밤을 새며 지켜오고 있다. 공장은 적막했지만 어딘가 삼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 달이면 실업급여도 끊깁니다. 그동안 돌아가면서 틈틈이 막노동이라도 나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나마 그런 일자리도 없습니다. 우리 같은 장기투쟁 사업장에서는 가장 걸리는 게 생계 문제죠.” 김윤철 금강화섬 노조 부위원장의 이야기다.

공장이 멈춰선 게 지난해 3월 25일. 그때부터 노조의 폐업반대 투쟁이 시작됐다. 노조는 공장을 점거하고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조합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를 짜서 공장을 지켰다. 공장 곳곳에 노조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꼈고 설비는 조금씩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녹이 슬어갔다. 다시 일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훌쩍 1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회사는 부도를 맞고 매각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 2월 11일, 채권단의 4차 경매에서 금강화섬은 자동차 부품회사인 경한정밀에 320억200만원에 낙찰돼 팔려나갔다. 노조의 폐업반대 투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노조는 공장 재가동을 전제로 고용과 단체협상, 노동조건의 승계를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새로운 경영진이 혹시라도 회사를 매각 청산할 경우를 대비, 순찰과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공시지가 기준으로 금강화섬 구미공장의 부지는 157억원, 설비와 기타 유형자산을 포함하면 자산은 모두 1441억원 규모에 이른다. 노조는 경한정밀이 공장 부지와 설비를 따로 매각, 본격적인 청산 절차를 밟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경찰이나 용역 깡패와 대치할 가능성도 있다. 노조의 요구가 관철되기 전에는 누구도 공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상연 경한정밀 사장은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설비 상태를 점검하고 난 다음 공장 재가동을 검토할 계획이지만 현재로서는 매각 청산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조가 아직까지 회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며 “이렇게 강성 노조가 있는 줄 알았다면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한정밀은 2월 1일 경한인더스트리라는 계열회사를 설립하고 금강화섬 인수를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들이 공장을 인수해 가동시킨다고 해도 노조와 상당한 마찰을 빚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금강화섬은 화학섬유 원사와 직물 등을 만드는 회사다. 전체 매출에서 원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78%에 이른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2003년 기준으로 매출액이 1313억원, 원사 하루 생산량이 211톤, 시장점유율이 4.7%에 이르는 업계 7위의 업체였다.

문제는 유가가 급등하면서 원재료 가격이 뛰어오르면서부터다. 원사의 재료로 쓰이는 테레프탈산의 가격은 2002년 1톤에 500달러에서 지난해에는 695달러까지 39%나 뛰어올랐다. 에틸렌글리콜도 1톤에 500달러에서 850달러로 무려 70%나 뛰어올랐다. 그 사이 환율 하락을 감안해도 엄청난 부담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직물·의류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원사 수요가 줄어들면서 원사 단가도 크게 떨어졌다. 폴리에스테르 원사의 내수 단가는 2002년 1kg에 1416원에서 지난해에는 1231원까지 13.1% 떨어졌다. 원료 가격은 오르고 제품 단가는 떨어지는 이중고에 직면한 셈이다. 중국 업체들이 추격해 오면서 수출도 여의치 않게 됐다.

운영자금이 바닥난 것은 2003년 말부터였다. 원재료를 납품하던 삼성석유화학과 호남석유화학은 지난해 들어 하루 단위로 대금 결제를 해줄 것을 요구했고 결제가 미뤄지자 가차없이 납품을 중단했다. 공장은 그날부터 멈춰섰다. 민성기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회사를 포기하고 부도를 방치했다.

섬유산업의 몰락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금강화섬의 폐업은 단순히 사양산업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금강화섬은 구미지역 화학섬유회사 가운데서도 최첨단 설비를 자랑하는 회사다. 위기는 직물·의류회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원사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작됐다. 직물·의류회사들의 몰락이 화학섬유회사들의 몰락을 낳고 화학섬유회사들의 몰락이 석유화학회사들의 목을 조르는 전형적인 제조업 공동화가 시작되고 있다.

특히 화학섬유산업의 공동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됐다. 새한과 동국무역은 기업개선작업이 진행 중이고 한일합섬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고합은 대부분 사업을 매각 청산했다. 금강합섬 인근의 한국합섬은 자본잠식 상태다. 코오롱과 효성 같은 대기업들도 경영악화와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위기는 중소기업에서 시작해서 대기업으로 번져간다. 아무리 첨단설비를 들여놔도 산업이 죽는데는 도리가 없다. 금강화섬 같은 폴리에스터를 만드는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해외로 옮겨가면 직물회사들은 이를 다시 해외에서 수입해 들여와야 한다. 생산 원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고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양산업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화학섬유나 직물회사는 물론이고 의류, 석유화학 등 섬유산업 전체가 공동화될 위험도 있다.

섬유산업이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 기준 7.9%로 2002년 기준으로 전기·전자, 반도체, 자동차에 이어 4위 규모다. 무역수지 흑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24%에 이른다. 이런 산업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는데도 정부나 업계나 속수무책이다.

금강화섬 노조의 지난 1년은 망한 회사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이 될만하다. 흔히 회사가 어려울 때 노동자들은 회사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임금을 깎거나 퇴직금을 반납하는데 동의한다. 이른 바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논리다. 만약 그때 인건비 삭감에 동의했다면 폐업을 막을 수 있었을까.

금강화섬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사실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금강화섬의 위기는 화학섬유산업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조업 전반의 위기다.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그 위기를 넘어설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은 체불 임금과 휴업 수당, 퇴직금 등을 요구해서 받아냈고 앞으로 다가올 투쟁에 대비해 착실하게 기금을 적립했다. 이들은 끝까지 회사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살리기에 주력했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제조업의 위기와 공동화는 이제 당면한 현실이고 노동자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위기가 노동자들이 고통을 분담하는 것으로 넘어설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망할 회사라면 망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 노동자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어설프게 타협하면 당장 문을 닫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더 심각하고 비참한 위기를 맞게 되고 그런 타협이 결국 노동자 전체를 죽이는 길이 된다.

금강화섬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있다는 자존심이 살아있다.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맞서 이들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켜냈다. “벌써 1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는 이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디서든 일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백문기 노조 위원장의 이야기다.

금강화섬 노조는 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가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고 있다. 제조업 공동화가 당면한 현실이라면 정부가 나서서 폐업 노동자들에게 휴업 수당이나 부채 탕감, 생계비 지원 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노조는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상경투쟁을 벌였고 지난해 11월에는 섬유산업의 공동화 문제를 놓고 민주노총·민주노동당과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연대투쟁도 강화하고 있다. 1월 18일에 치러진 투쟁 300일 기념 1일 호프는 전국에서 몰려온 노동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2월 2일 국회 앞 집회에는 금강화섬 노조 조합원뿐만 아니라 경찰청 고용직 공무원 노조와 통신산업 비정규직 노조, 새마을호 여승무원 공동대책위원회 등 장기투쟁 사업장과 중소영세 사업장들의 조합원들이 함께 참석했다. 그동안 두차례의 상경투쟁으로 연대를 다진 덕분이다. 이날도 이들은 국회 앞 집회를 치른 뒤 성진애드컴과 한원컨트리클럽, 풀무원 노조 등을 방문, 연대투쟁에 나섰다.

“상경투쟁과 연대투쟁에 나설 때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노동자들도 있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연대만 잘 되면 함께 싸워볼만 하겠다는 자신감도 듭니다.” 국회 앞 집회에서 만난 한 조합원의 이야기다. 조합원들 사이에는 “금강화섬 노조는 연대전문 노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이들은 공장이 문을 닫고 나서야 제조업의 위기나 제조업 공동화 문제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문제들이 금강화섬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산업전반의 문제고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도 했다. 다른 회사 노조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대 정부 투쟁으로 방향을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부가 내놓는 제조업 공동화 대책은 규제 완화와 철폐, 세제 지원 등 철저하게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정작 제조업 종사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정부는 오히려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 확대 등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적이 뚜렷하지 않은 막막한 싸움이었습니다. 회사를 포기한 사장이나 채권단에게 매달릴 수도 없고 새로운 자본을 찾을 수도 없고 말이죠. 그나마 노조가 있었으니까 희망을 갖고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정부와 맞서 싸울 자신감도 있습니다.” 전직 노조 간부였다는 한 조합원의 이야기다.

270여명의 조합원 가운데 아직까지 공장에 남아서 활동하는 조합원은 160여명 정도다. 날마다 저녁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간부회의가 열리고 8시부터는 교육과 발표·토론 시간이다. 토론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진다. 아침 6시가 되면 일어나 약식 집회를 갖고 생계 투쟁을 위해 흩어진다. 경한인더스트리의 인수가 결정된 다음부터는 10명씩 조를 짜서 24시간 순찰·경계를 계획하고 있다.

노조는 최근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양말 판매를 시작했다. 1년여의 투쟁과 수감 중인 조합원의 생계비 지원 등으로 조합비도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실업급여 마저 끊기면서 조합원들도 다들 생활의 무게를 힘겹게 견뎌내는 중이다. 겨울은 끝나가지만 공장의 굳게 닫힌 철문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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