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왜 이헌재에게 끌려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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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지난 2년 동안 입만 열면 양극화 문제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 해법은 늘 선언에 그쳤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은 철저하게 대기업과 기득권 계층의 이해에 맞춰져 왔다. 역대 어느 정부 못지않게 신자유주의에 충실한 노무현 정부가 좌파 정부로 오도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노 대통령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초 이 부총리는 새해 개각에서 경질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결국 유임됐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 따르면 “달리는 말의 기수는 바꾸지 않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말이 제대로 달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부총리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1등 공신으로 꼽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난해 2월 그가 취임하자마자 부딪혔던 문제들은 모두 김대중 정부 시절 그가 만든 작품들이었다. 그 작품들은 여전히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노무현 정부와 이 부총리의 개혁정책이 마냥 겉돌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부총리는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던 무렵 금융 구조조정과 재벌 개혁을 진두 지휘했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00년 1월 재경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 부총리는 철저하게 IMF의 요구를 수용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혹독한 금융 구조조정 결과 은행은 35개에서 21개로, 시중은행은 14개에서 8개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그 가운데 3개는 이미 외국자본에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다. 은행들 덩치는 커졌고 그만큼 실적도 좋아졌지만 그 폐해도 만만치 않다. IMF는 엄격한 부채비율 관리를 요구했고 은행은 기업대출 보다는 손쉬운 가계대출에 눈을 돌렸다. 기업대출 축소는 설비투자와 고용 부진을 불러왔고 곧 중소기업의 연쇄도산으로 이어졌다.

내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를 늘린 것도 이 부총리의 결정적 실수였다. 이 부총리의 신용카드 정책은 일시적으로 내수 진작과 경기 부양을 불러왔지만 결국 400만명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와 가계 부실을 낳았고 한국경제를 끝없는 침체의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 덕분에 IMF 금융위기는 벗어났지만 한국경제는 양극화와 자본종속, 성장의 한계라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부총리는 금융산업의 졸속 매각에도 책임이 있다. 이 부총리는 1999년 17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털에 단돈 5000억원에 매각했다. 그리고 5년 뒤 뉴브리지는 1조2000억원의 투자수익을 올리면서 제일은행을 스탠더드챠터드은행에 다시 매각했다. 그 과정에서 단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고 정부는 5조원의 공적자금을 날렸다.

이 부총리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외환위기 당시 제일은행을 매각해 대외 신인도를 높였지만 선진 금융기법이나 기업금융 등에 대한 기대효과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며 사실상 실패를 시인했다. 제일은행의 실패는 외환은행과 한미은행의 실패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중심에 서 있느냐다. 노 대통령은 왜 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청와대는 주인이 바뀌었지만 재경부는 심지어 장관까지 그대로다. 재경부의 시장친화와 성장우선주의는 여전히 확고하다. 이 부총리는 철저하게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고 관철시켜 왔다. 지난해 말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를 둘러싼 국회의 논란은 이런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준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3대 시장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로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를 적극 추진해왔다. 집단소송법은 2003년 12월에 통과돼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1월부터 시행됐다. 문제는 이 법이 시행되기까지의 과정이다. 법 시행을 며칠 앞둔 지난해 말 이 부총리가 직접 국회까지 찾아와 과거 분식회계의 집단소송제 적용을 2년 유예해 달라고 건의했고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한 경제단체들도 때맞춰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에 접수했다.

당내 강경파 의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해를 넘기긴 했지만 열린우리당은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상정할 계획이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 경제개혁의 유일한 성과로 평가됐던 집단소송법이 자칫 시행 두달만에 좌초할 분위기다. 국회 의결과 공포를 거쳐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까지 무력화시킬만큼 이 부총리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노 대통령의 개혁정책이 재경부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는 경우는 이밖에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4월 열린우리당이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다.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난 뒤 돌변한다. 건설경기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불협화음이 커지자 급기야 이 부총리가 거들고 나섰다.

그는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를 모르는 386 여당 의원들 때문에 시장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면서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아야 나라가 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경제가 흔들린다는 경제 부총리의 충격 발언에 보수언론은 온갖 호들갑을 떨었고 청와대와 여당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흐지부지 없던 일로 됐다.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았던 1가구 3주택 중과세도 비슷한 경우다. 유예 여부를 놓고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과 맞서다가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이 부총리는 최근 다시 일부 예외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경제문제의 전체 선장은 부총리고, 청와대와 참모들은 항해하는 선장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협의하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고 꼬리를 내렸다.

재벌 개혁의 핵심 쟁점이었던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예외는 아니다.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해 오는 4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열린우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되면 그렇잖아도 예외가 많은 이 법은 껍데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전망이다. 열린우리당은 1월 10일 재경부와 당정협의를 갖고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예외를 인정하는 조항을 시행령 개정안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 부총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이 부총리의 취임 1년을 맞아 “인위적 단기부양 정책과 망국적 땅 투기에만 몰두하는 경제 수장은 물러나야 한다”며 ‘이 부총리가 물러나야 하는 14가지 이유’를 발표하기도 했다. 경실련은 이 부총리의 정책이 “경제의 근본적 구조를 개혁하기보다는 과거의 경제 질서로 회귀, 강화하는 정책들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 근본적으로 배치된다”며 “참여정부의 정체성이 위기의 수준에 있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부분은 노 대통령의 의중이다. 언뜻 재경부와 이 부총리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번 개각에서 노 대통령이 이 부총리의 유임을 결정한 배경에는 재경부의 시장친화와 성장중심주의를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포석이 깔려있다. 설비투자와 고용 창출이 다급한 상황에서 재벌 대기업의 이해를 무시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노무현 정부와 재경부는 의견 충돌조차도 없다. 담론이 없으니 충돌할 부분이 없는 건 당연하다. 청와대는 재경부가 이끄는 대로 그냥 따라가기만 한다. 부딪히는 부분이라면 과거 한때 신용불량자 문제와 부동산 대책 정도가 전부다.”

전직 재경부 파견 청와대 보좌관의 이야기다.

물론 이 부총리에게 실패한 개혁의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이 부총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태생적 한계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자유주의 개혁의 폐해를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넘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시장과 기득권 계층의 논리에 굴복했고 의욕적으로 내놓았던 일련의 분배강화 정책들은 모두 공허한 구호로 끝났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 대통령은 파견근로의 전면 확대와 기간 연장을 골자로 하는 파견근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연대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용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 법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에 대한 요양기관 의무지정제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고 계약제가 도입되면 병원이 자율적으로 건강보험 적용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닌 병원에서는 병원이 자율적으로 진료비를 책정하고 환자는 진료비를 전액 부담해야 한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는 서비스 차별화를 통한 수익확대를 고민해 왔던 의료계의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상당수 의료기관들이 건강보험 적용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병원의 차별화와 양극화를 불러오고 결국 돈이 없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의료공백 상황까지 이어질 수 있다. 건강보험을 거부하는 병원이 늘어나면 민간 의료보험이 확대되고 보험업계도 큰 혜택을 입게 될 전망이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연기금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이른바 한국형 뉴딜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청와대와 재경부의 반발에 부딪혀 하루만에 번복하기도 했다. “경제부처가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던 그는 해외순방 중이던 노 대통령이 유감의 뜻을 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결과적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물러섰다.

열린우리당도 중심을 못 잡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정기국회 막바지 무렵, 4대 개혁입법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당의 합의 아래 파병연장동의안을 비롯해 경제자유구역법과 민간투자법,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 공무원노조특별법 등이 은근슬쩍 통과됐다. 4대 개혁입법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언론관계법이 통과됐다. 그나마 언론관계법은 당초의 취지에서 크게 퇴색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에 통과된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에 따르면 인천과 부산, 진해 등 경제자유구역에 들어서는 외국인 병원을 내국인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역에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의료수가도 병원 자율로 정할 수 있다. 사실상 의료기관의 차별화가 시작되는 셈이다.

민간투자법과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을 삭제하고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하는 이른바 한국형 뉴딜정책 가운데 하나다. 2월 임시국회에서 다시 논의될 국민연금법과 함께 연기금을 동원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법들이다.

이밖에도 공무원노조특별법은 공무원의 노조 조직과 단체교섭을 인정하되 파업 등 쟁의행위를 금지하고 있어 반발이 예상된다. 열린우리당은 이 법들을 새해 1월 1일 새벽 3시에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개혁의 퇴조와 맞물려 등장한 실용주의 노선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주미대사 임명에서 빛을 발한다. 홍 회장의 기용은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거대 보수언론 가운데 중앙일보가 유일하게 노무현 정부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과 무관치 않다. 또 홍 회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처남이라는 사실도 그동안 삼성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를 일신하는데 한 몫을 할 전망이다.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이 주축이 된 노 대통령의 친위그룹 의정연구센터와 삼성의 밀월관계도 주목할만하다. 의정연구센터는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경제살리기 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전경련 회장단 등과 간담회를 갖는 등 재벌과 기득권 계층 끌어안기에 앞장서왔다. 이들은 4대 개혁입법 등 개혁과제에는 철저히 입을 다물면서 연기금의 주식투자 활성화나 에너지 산업 민영화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골몰해 왔다.

오죽하면 골수 보수파로 꼽히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까지 “산자위 386은 빨갱이가 아니네”라고 호감을 표시했을 정도다. 이 의원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근대의 물리력이나 경찰의 곤봉보다 더 큰 사회적 폭력은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변신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변신은 노무현 정부 개혁의 퇴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실용주의는 최근 임채정 열린우리당 신임 당의장의 연두 기자회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임 의장은 “실용주의는 규정된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느 쪽이든 사용하는 것”이라며 “실용주의가 개혁과 다른 대립선상에 있는 것처럼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압권은 지난해 9월 노 대통령의 러시아 순방 도중 기업인 만찬에서의 발언이다.

“‘기업이 바로 나라다’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는 결국 기업이 한다. 기업이 잘 되면 경제도 잘 되고 경제가 잘 돼야 정치도 잘 된다. 기업이 잘 되게 하는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

노무현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설비투자와 고용 확대를 통한 내수 창출이다. 노 대통령은 양극화의 딜레마를 재벌 대기업과 시장의 힘으로 넘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부딪힐 때마다 기꺼이 재경부와 재벌 대기업의 손을 들어줬고 그때마다 개혁 정책은 크게 후퇴했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경제의 기반은 갈수록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아래서 이 같은 성장정책에 한계가 분명하다는데 있다. 전병서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본부장은 “지난 몇년동안 국내 대기업들이 거둔 사상 최대의 실적은 IMF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의 결과 경쟁업체가 사라진데 따른 과점경쟁의 혜택과 그 착시현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과점경쟁의 혜택은 이미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조원희 성공회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성장은 이익의 독점과 비용의 외부전가에서 비롯한다”고 지적한다. “금융 세계화와 구조조정으로 일시적인 성장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결국 극단적인 양극화와 성장의 한계를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7년 동안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성장의 비용을 떠맡았다.

한국경제는 지금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은행과 대기업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는데도 시장에는 돈이 돌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내수 시장은 끝없이 무너지고 있다. 주주들은 돈을 벌지만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고 결국 새로운 설비 투자가 뒤따르지 않는 이상 성장의 한계는 분명하다. 기업은 설비투자를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 딜레마를 풀어야 한다. 이제 무분별한 시장개방과 시장친화, 성장우선주의로 위기를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7년, 신자유주의 개혁은 위기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켜왔다. 위기의 본질은 결국 금융세계화와 자본종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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