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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자본주의라는 유령.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4, 2005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자본시장 또는 주주 자본주의라는 유령이다.”

돈이 돈을 벌어주던 때도 있었다.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17.85%까지 치솟았던 1998년만 해도 1억원을 은행에 넣어두면 한달에 이자로 얼추 148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한해 이자만 1785만원, 4년만 지나면 원금이 두배로 불어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고 지난달 기준으로 금리는 3.5%까지 떨어졌다. 물가 상승률에도 못미치는 그야말로 제로 금리 또는 마이너스 금리다. 문제는 이런 저금리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세계적인 현상이라는데 있다. 1억원을 넣어둬도 이제 한달에 이자는 30만원도 안된다. 당신이 만약 엄청난 부자라면 요즘 같은 때 은행에 마냥 돈을 묻어두는 것은 바보 짓이다. 돈을 벌려면 당신은 좀더 적극적인 자산운용, 특히 주식투자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림 : 정기예금 금리 변동 추이. 1996년 1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단위 : %) (이정환닷컴)

세계적으로 저금리가 유행인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금리가 낮으면 투자가 늘어나고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주식과 부동산의 가치를 높여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도 있다. 게다가 미국의 영향도 있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대규모 구조조정과 저금리 기조로 호황을 이끌어왔고 자본시장 개방과 맞물려 세계적으로 금리가 동반 하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식투자는 이를테면 돈 있는 사람들의 ‘로망’이다. 꺼져가는 금리를 붙잡을 수는 없지만 경제가 망가지지 않는 이상 언젠가 주가는 뛰어오르게 돼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주가는 다른 나라들보다 아직도 턱없이 낮다. 경제는 엉망이더라도 오르는 종목은 오른다. 어쩌면 주식투자가 이 저금리 시대의 유일하게 돈 버는 방법일 수도 있다. 온 나라가 주식시장에 목을 매는 것도 그런 절박한 이유에서다.

재정경제부가 최근 발표한 증권산업 규제완화 방안도 그런 맥락에서 눈길을 끈다. 자본시장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증권업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재경부의 선심에 증권회사들은 두손을 치켜들고 환영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자산운용업과 투자은행이 활성화될 거라는 기대도 나왔다. 언뜻 재경부는 최근의 위기를 자본시장 육성정책으로 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 증권사들도 은행과 마찬가지로 신탁업무를 할 수 있게 됐다. 부동산을 매매할 수도 있고 유가증권 취급 범위가 넓어지면서 주식연계증권(ELS)과 같은 기존 파생상품은 물론 환율이나 금리, 신용, 금 등과 연계된 여러 금융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됐다. 신탁자산의 규모가 아니라 수익성과 규모에 따라 수수료를 받도록 허용한 부분도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 자본시장 육성정책이 설비투자와 고용부진, 중소기업의 붕괴, 양극화와 내수침체 등 실물경제의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시장 중심의 경제구조에는 몇가지 치명적 오류들이 있다.

1. 자본시장은 실물경제에 도움이 안된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직접 금융시장의 기능을 상실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놀랍게도 주식시장에서 기업에 흘러들어간 돈 보다 거꾸로 빠져나온 돈이 더 많다. 2003년 기준으로 유상증자와 신규 상장 등 기업에 흘러들어간 돈은 모두 11조1686억원,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으로 기업에서 빠져나간 돈은 15조1557억원에 이른다. 빠져나간 돈이 4조원 가까이 더 많다는 이야기다.

지난해에도 흘러들어간 돈은 4조9635억원에 그친 반면 빠져나간 돈은 8조3472억원으로 절반 정도에 그쳤다. 정승일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는 이런 상황을 “주식시장의 기업 수탈”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시장이 발달돼 있는 미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주식시장에 투자된 자본 100달러 가운데 기업의 생산적 투자에 들어간 돈은 1달러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99달러는 모두 투기에 사용됐다.

2. 자본시장은 투기자본의 배만 불려준다.

게다가 정작 그렇게 흘러들어간 돈의 상당부분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이 받아간 주식투자 배당금은 무려 47억3800만달러, 전년 같은 기간보다 40.1% 늘어난 규모다. 환율 1153.16원을 적용해 환산하면 5조4600억 원에 이른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배당수입은 1998년 4억9920만달러에서 2000년 18억4440만달러로 2002년 24억4200만달러, 2003년 35억6650만달러로 해마다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3. 자본시장은 기업의 성장성을 좀먹는다.

은행 중심에서 자본시장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기업은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당장의 주가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됐다. 주식시장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설비투자를 하려면 그만큼 이익이 줄어들고 당장 주가가 떨어진다. 실제로 설비투자 계획을 발표한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는 경우도 흔하다. 주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규 사업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기업들은 이제 더이상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중소기업은 더욱 심각하다.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설비투자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12.8%에서 2003년 9.5%로 줄어들었다. 1998년 이래 가장 낮은 규모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설비투자 규모는 1995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기업이 더 이상 새로운 공장을 짓거나 새로운 기계를 들여놓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유철규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경제의 공격성이 거세됐다”고 지적한다. 자동차 생산 세계 5위를 비롯해 선박 건조량 1위, D램 반도체 시장 점유율 38% 등의 과거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끌어왔던 공격적인 설비투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유 교수는 철저하게 수익성을 강조하는 주식시장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4. 자본시장은 양극화를 부추긴다.

주가가 오른다는 것은 사회의 부가 주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빠져나와 주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시장 중심의 경제구조는 부의 재분배와 양극화를 불러온다. 결국 종합주가지수가 1000이나 2000까지 뛰어오른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거대자본과 그들을 좇는 주식 투자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낸 조작된 환상이다. (월간 말 1월호 참조)

5. 자본시장의 성장은 한계가 분명하다.

세계 경제는 빠른 속도로 은행 중심에서 주식시장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제 모든 게 주가로 환산된다.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새로운 수익성을 확보하는 기업이 살아남는다. 전통적으로 은행 중심 경제에 의존해왔던 일본과 유럽도 이미 버텨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자본시장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더이상 재화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집중되고 편중될 뿐이다. 윤소영 한신대학교 교수는 자본시장 중심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주가가 끝없이 오르지는 않는다. 미국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으로 주가를 끌어올렸다.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이 역시도 한계가 분명하다. 기업의 수익성은 높아지겠지만 산업 전체의 성장성이 줄어들면서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로 옮겨가면서 가능성을 찾겠지만 이렇게 가면 세계 자본주의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제 고용도 설비투자도 없으면서 수익은 늘어나는 기묘한 자본주의를 겪고 있다.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 수익이 결코 기존 경제 주체들의 몫이 아니라 거대자본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가로 우리의 미래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는 자본시장 활성화에 ‘올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은 노 대통령이 지난달 8일 프랑스 순방도중 프랑스경제인연합회 조찬간담회에서 한 발언 가운데 일부다.

“한국은 대외개방에 있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이제 상품뿐만 아니라 자본시장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가장 개방되어 있는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일례로 외국인투자가 주식시장 총액의 4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또한 한국은 동북아의 금융허브로 성장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입니다. 풍부한 연기금 자산을 토대로 자산운용업에 특화하면서 채권 주식 외환시장 선진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경제인 여러분, 지금 한국에 투자하십시오. 한국을 거점으로 삼아 중국, 극동러시아, 일본으로 진출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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