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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기업들 떤다.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1, 2005

10억원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걸려면 변호사 선임료를 빼고도 소송비용만 408만7400원이 든다. 인지대가 0.35%에 그밖의 수수료가 좀 붙는다. 10억원짜리 소송을 1000명이 함께 내려면 40억원이 넘는 소송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재판에 지면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한사람이 대표로 소송을 내면 나머지 소송 당사자들도 재판 결과에 따라 똑같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이른바 집단소송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에서도 새해들어 증권관련 집단소송제가 일단 시행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29일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집단소송제의 시행을 늦추거나 과거분식을 한시적으로 유예하자는 내용의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5 대 3으로 부결했다. 이에 따라 2003년 12월 통과된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는 1년의 유예기간이 끝나는 올해 1월 1일부터 전격 시행에 들어갔다.

이제 50명 이상의 주주가 모여 전체 주식의 0.01%, 즉 10만분의 1 이상을 확보해 소송을 내고 승소하면 모든 주주들이 동일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재판의 결과가 소송을 낸 당사자들에게만 적용됐다. 기업의 분식회계나 주가조작, 허위공시, 내부자거래 등으로 인한 손해가 그 대상이지만 가장 큰 관심은 역시 분식회계다. 분식회계는 기업이 자산, 매출, 비용 등을 실제보다 확대, 또는 축소하는 장부왜곡 행위를 통칭한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그동안 엄청난 소송비용 때문에 쉽게 소송을 내지 못했던 소액주주들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몇사람만 모여서 대표로 소송을 내면 된다는 이야기다. 대상 기업은 일단 올해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상장 등록기업부터 시작해 2007년이면 모든 기업으로 확대 시행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의 기업은 82개에 이른다.

문제는 앞으로 저지를 분식회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분식회계에 대해서도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있다. 집단소송법은 적용대상과 관련해 부칙 2조에서 “시행 이후로 최초로 행하여진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부터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뜻 올해부터 분식회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한번 분식회계는 또 다른 분식회계를 계속 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과거의 분식회계를 모두 고해성사하고 재무제표를 바로잡지 않는 이상 한번이라도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들은 모두 집단소송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기업들은 소송 남발과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집단소송법의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2002년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을 당한 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이 1조9000억달러(약 2100조원)나 줄었다는 통계도 이런 맥락에서 인용된다. 2002년 기준 미국에서 제기된 집단소송은 모두 224건으로 전년대비 31%나 늘어났다. 더 곤란한 문제는 판결이 나기도 전에 소송에 휘말렸다는 뉴스만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도 흔하다는데 있다. 손해배상 금액이 터무니 없이 많이 나와 아예 파산신청을 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집단소송제의 도입을 꺼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과거 분식회계의 책임을 둘러싼 의견 대립도 주목할만하다. 기업들은 법 시행 이전의 분식회계에 대해 면죄부를 요구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법 공포일 이전에 이뤄진 분식회계를 집단소송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에 접수한 바 있다. 홍재형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은 지난달 27일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당정협의를 마치고 과거 분식의 집단소송제 적용을 2년 유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고 대부분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열린우리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당정협의의 결정에 거세게 반발했다. 최재천 의원 등은 “회계의 연속성을 감안할 때 과거의 분식을 눈감아준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분식을 눈감아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2년 유예를 하더라도 2년 뒤에는 결국 현재와 똑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반박도 있었다. 이날 개정안은 열린우리당 4표와 민주노동당 1표, 모두 5표의 반대표를 얻어 한나라당 반대표 3표를 누르고 결국 부결됐다.

그러나 이튿날인 지난달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새해 2월 임시국회에서 다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법사위는 보도자료를 내고 “제한된 국회 일정과 추가 의견 수렴 필요성 및 과거분식과 현재분식 간의 회계상 구별의 어려움에 따른 법 기술적 문제점으로 이번 임시국회에서 개정안을 처리하지 못했다”며 “국회 차원에서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경제신문들은 일제히 이 기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과거 분식의 적용을 유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집단소송 강행 유감이다”라는 칼럼을 통해 “회계의 특성상 한번 이뤄진 분식은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악순환 고리를 끊을 기회를 주지 않으면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업들 이 지속적으로 분식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도 “연초부터 집단소송 회오리가 불면 기업 활동은 더욱 위축되고 경제 회복도 늦어질 것”이라며 개정안을 즉시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82개 집단소송제 대상 기업 가운데 집단소송 대상 공시서류의 허위기재 등과 관련해 제재를 받은 회사는 모두 18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 기업들의 정기보고서 오류 정정비율도 24.6%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수시공시의 경우도 6.9%에 이르렀다. 공시감독국 최규윤 부국장은 “미국에서도 지난해 집단소송 사유의 89%가 사업보고서 허위기재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최 부국장은 “공시와 관련한 기업의 내부통제시스템의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내부 공시시스템을 조기구축하는 등 집단소송 피소가능성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둘러싼 잡음은 노무현 정부 개혁정책의 혼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개정안이 일단 부결되기는 했지만 기업의 엄살과 정치권의 기업 편들기 바람에 휩쓸려 집단소송제는 사실상 백지화될 우려가 있다. 핵심은 과거의 분식회계든 앞으로 저지를 분식회계든 합리적이고 투명한 회계 관행이 자리잡아야 한다는데 있다. 다행히 개정안이 통과돼 2년을 유예하더라도 과거의 분식회계는 언젠가 털고 가야할 짐이다. 집단소송제라는 골치덩어리를 맞닥뜨린 기업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경제의 위기 원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주주자본주의의 확산에서 찾을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주식시장 중심으로 개편된 경제구조는 투자와 고용부진을 낳았고 장기적인 성장성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부정에 맞서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측면이 있지만 자칫 주주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 제도가 보호하는 소액주주는 대주주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경영권을 쥐지 못한 주주들은 회사의 미래보다는 단기적인 투자 수익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는 철저하게 이들 소액주주의 피해에 초점을 맞춘다. 주주들은 기업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10년 뒤를 내다보기보다는 1년 뒤, 짧게는 한달이나 일주일, 또는 하루 뒤를 내다보고 주식투자에 뛰어든다. 상황에 따라서는 집단소송도 하나의 투자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일찌감치 집단소송제를 도입한 미국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투자이익을 건질 수만 있다면 회사가 문을 닫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분식회계나 기업의 부정은 뿌리 뽑아야겠지만 집단소송제가 자본의 투기적 속성과 결합할 때 자칫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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