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사라진다’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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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또는 국민기업이 과연 투기자본의 대안일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과제다.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의 사례가 주목받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스웨덴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건희 회장의 지배권을 법으로 보장해주면서 삼성그룹에 사회적 책임을 강제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말이야 좋지만 강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스웨덴은 대주주의 지배권을 내주면서 이른바 사회적 타협을 끌어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보다도 투자와 고용이다. 더 많은 공장을 짓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그래서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이게 안되고 있다.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배당으로 주주들에게 빠져 나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쌓여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일도 당연히 없다. 기업은 돈을 버는데 사람들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돈은 넘쳐나는데 풀리지 않는다. 이 모든게 IMF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심상치 않다.

이 책은 문제의 발단을 투기자본과 주주 자본주의, 금융시장의 왜곡에서 찾는다. 투기자본 문제에 앞장서온 이찬근 교수를 비롯해 대안연대회의와 투기자본 감시센터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공동집필했다. 최근 몇년 사이 은행들 움직임을 살펴보면 논의의 지점이 명확해진다. 먼저 은행의 덩치가 커졌다. 세계 200대 은행 가운데 7개가 우리나라에 있다. 1997년만 해도 외환은행 하나밖에 없었다.

주목할 부분은 이들 은행의 자산운용 방식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제조업 기업들이 설비투자의 75% 이상을 은행 차입금 등 외부자금에 의존했는데 1999년 들어 30% 정도로 줄어들기 시작해 올해 들어서는 15.6%에 그쳤다. 주식시장 의존도도 낮고 나머지는 거의 기업의 내부자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은행이 은행의 역할을 포기하면서 이제 돈이 없는 기업은 더이상 설비투자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은행은 은행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다. 먼저 예대마진이 1996년 0.42%에서 올해 들어서는 9월 기준으로 2.23%까지 크게 뛰어올랐다. 전체 수익의 25% 정도가 현금인출 수수료 등 비이자 부문에서 나온다는 통계도 있다. 굳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1997년만 해도 65 대 32던 기업 대 가계대출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53 대 45로 역전됐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400만명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와 가구당 2926만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로 나타났다. 기업은 기업대로 죽어나고 일자리는 줄어들고 내수시장은 끝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 와중에 은행과 몇몇 대기업만 돈을 긁어들이고 있다. 그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다. 미래를 부정하면서 스스로 목을 조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찬근 교수는 이 모든 문제가 투기자본이 은행과 대기업을 장악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이미 웬만한 기업과 은행의 외국인 투자자 지분 비율이 50%를 넘어섰고 그에 따라 주주의 이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주주들은 10년 뒤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노동자를 자르면 주가가 오르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하면 주가가 떨어진다. 기업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이 갈라지는 부분이다.

유철규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경제의 공격성이 거세됐다”고 정리한다. 자동차와 철강, 반도체, 조선 등 그동안 우리 경제를 끌어왔던 공격적인 설비투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원희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극단적으로 전개되면 투자와 투기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주주 자본주의고 투기는 주주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병리 현상이라는 이야기다.

정승일 교수의 지적도 주목할만 하다. 1990년대 초 폴란드 시내에는 이런 대자보가 나붙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얻은 것은 알고보니 자본주의였다.” 정 교수는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원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얻은 것은 알고보니 주주 자본주의였다.”

이들이 스웨덴 모델에 주목하는 것은 주주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 결국 국내 기업, 특히 재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민 기업’을 만들고 이들을 앞세워 투기자본과 주주 자본주의에 맞서자는 이야기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많다.

최근 국제사무직노동자연맹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는 스웨덴 모델을 놓고 해묵은 논쟁이 재연됐다. 스웨덴의 이른바 ‘국민 기업’들이 스웨덴 국민들을 배신하고 있다는게 논쟁의 핵심이었다. 고삐 풀린 재벌이 독점 기업이 됐고 이들의 독점 가격이 복지 비용을 높여 복지국가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대안연대회의 쪽 반박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재벌을 해체하면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뭐가 있느냐는 논리다. 정승일 교수의 경우 스웨덴 모델의 성공 요인을 성장을 통한 분배에서 찾는다. 오히려 국내 기업을 보호해주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돕는게 위기를 벗어나는 해답이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최근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까지 대안연대회의의 주장을 차용해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재벌 개혁을 반대하는 논리로 전용하고 있다. 그 경계는 언뜻 모호하다. 이들은 국부유출을 막기 위해 그 국부를 재벌에게 넘겨주자고 주장한다.

유철규 교수는 이런 논쟁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국적과 무관하게 이 땅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에게 민주적 책임성과 투명성을 요구해야 한다. 외국 자본과 손잡고 국내 재벌을 공격하거나 재벌과 손잡고 외국 자본에 대항하는 두가지 방식으로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결국 문제는 투기자본이 아니라 자본의 투기적 속성이다. 투기자본뿐만 아니라 국내 재벌까지 이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지금 위기의 본질이다. 전선을 명확히 그을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가 사라진다 / 이찬근 외 지음 / 21세기북스 펴냄 /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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