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사회적 책임 강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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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사회적 책임을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4일 금융경제연구소와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외환위기 7년을 맞아 개최한 ‘위기 이후의 한국’이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게리 딤스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사회 양극화 문제의 해법으로 은행과 지역공동체의 연대를 법적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딤스키 교수는 이날 한국 은행산업의 미래에 세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째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은행합병과 대형화 시나리오고 두번째는 한국이 동북아 금융 허브로 자리잡는 시나리오, 세번째는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시나리오다. 딤스키 교수는 한국을 투기자본의 천국으로 방치하지 않으려면 세번째 시나리오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번째 시나리오 : 대형화가 은행산업 망가뜨린다.

먼저 은행합병의 시나리오는 한국의 은행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딤스키 교수는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 전략은 미국에서나 통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방대한 부유층도 없고 월스트리트의 대대적인 지원도 없다. 덩치를 키운다고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폐해가 우려된다.

딤스키 교수는 미국과 우리나라 은행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은행 합병이 유행한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70년대 들어 금리가 높아지면서 예금과 대출 고객을 동시에 빼앗기게 된 은행들이 궁여지책으로 부유층 소매금융 전략을 선택했고 수수료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고객 확대가 절실하게 됐고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가 확산됐다. 인수합병이 지점 신설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형은행들은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도 그 가운데 하나고 시티은행이 대표적이다. 시티은행은 한미은행을 인수하면서 지점이 12개에서 222개로 늘어났다. 고객도 600만명에 이른다. 이 은행은 다른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처럼 신용카드와 자산관리를 중심으로 부유층 고객을 집중 공략할 전망이다.

문제는 대형화 과정에서 은행의 영업 관행이 바뀌게 된다는데 있다. 대출은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고 부유층을 중심으로한 소매금융이 핵심 사업이 된다. 규모를 키워서 더 많은 부유층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그 결과 은행은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중소기업과 저소득 계층은 금융산업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은행이 은행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두번째 시나리오 : 동북아 금융허브는 꿈이다.

딤스키 교수는 한국이 금융허브로 가는 전략도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절하했다. 한국은 홍콩이나 싱가폴에 비해 인프라와 국제화 정도가 뒤쳐진다는게 이유다. 또 일본이나 중국보다 국내 시장의 규모가 작고 일찌감치 금융허브 사업에 뛰어든 상하이나 대만과 경쟁에서도 승산이 없다.

미국에서도 금융허브 사업은 독자적인 수익모델을 만들지 못해 실패한 경우가 많았고 연계사업을 추진하는 전략도 대부분 엄청난 손실을 안기고 끝났다. 딤스키 교수는 한국의 금융허브 전략이 일정부분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일자리 창출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 시나리오 : 지역공동체의 연대가 유일한 해답이다.

딤스키 교수는 은행과 지역공동체의 연대를 위한 다섯가지 목표를 제안했다.

첫째, 저소득층에 대한 은행의 접근 가능성을 유지, 확대한다.
둘째, 해외 한국인의 국내 송금, 도시민의 농촌지역 송금을 활성화한다.
셋째,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의 지분출자를 확대한다.
넷째,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의 대출투자를 확대한다.
다섯째, 지역사회 인프라 건설사업에 적극 참여한다.

은행이 국가의 공적 지원을 받는다면 일정 수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딤스키 교수는 특히 은행이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미국처럼 지역재투자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의 지역재투자법은 은행이 소득 수준과 인종, 성별을 이유로 예금이나 대출, 투자 등 금융 서비스에 대한 지역민의 수요를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미국 중소기업청은 자영업 등 일정 규모 이하의 소사업장에 대해선 은행 대출의 최대 75%까지 보증해준다.

딤스키 교수는 “외환위기 과정에서 은행의 부실을 한국 사회가 떠맡았는데 이제는 외국계 자본이 그 이익을 챙겨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국에서도 과거와 달리 금융배제와 금융양극화 문제가 가시화 되고 있으므로 지역재투자법의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가 지역 재투자 실적이 높은 은행에 정부의 예금 자산과 공적 기금을 맡기는 등 은행의 성장지향형 행동을 유인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은행의 정부예금 유치실적과 공적기금 신탁관리 실적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해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하라는 이야기다.

이밖에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지원하는 출자펀드를 조성하거나 저소득˛실업층을 지원하는 특수목적기금을 활성화하라는 제안도 덧붙였다. 딤스키 교수는 “이런 대책들도 한국경제의 양극화를 막는데 충분치 못하다”고 전제하고 “은행이 경제적 효율성 외에도 사회적 효율성을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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