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관행과 방침, 시스템을 고발해야지.”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8, 2016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한국 언론에 던지는 질문 “자네는 그동안 어디 있었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미국 보스턴글로브가 폭로한 카톨릭 사제들의 집단 성추행 사건을 다룬 실화 영화다. 새로 부임한 편집국장 마틴 배런은 한 사제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칼럼에서 피해자측 변호사가 “추기경도 알고 있었다”고 언급한 대목을 파고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겠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은 들춰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원래 그런 거 아냐”라고 넘어가고 어쩐지 외면하고 싶은 사안이었다.

일방의 주장만 있을 뿐 사실 확인이 쉽지 않거나 실제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감안해야 했다. 합의로 끝난 재판 기록은 모두 비공개 처리돼 있고 교회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피해자들의 주장을 기록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러나 여러 사례를 모으자 하나의 패턴이 발견됐고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됐다. 기자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3년마다 옮겨 다니는 사제들을 전수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가설을 사실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크로스 체크하고 최종적으로 이를 확인해 줄 내부 고발자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부인할 수 없는 공식 문건을 확보해야 한다.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부딪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우연과 행운이 따라야 하지만 취재원들의 신뢰를 얻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렵사리 추기경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자들이 일단 이것부터 터뜨려야 한다고 하자 국장이 찬물을 끼얹는다. “조직에 초점을 맞춰요. 사제 개개인 말고. 관행과 방침에 대해. 교회가 체계를 조작해서 고소를 면했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바로 그 사제들을 다시 교구로 보내고 또 보냈다는 증거와 그리고 체계적으로 위에서 지시했다는 증거도.” 기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다.

스포트라이트팀은 단순히 성직자 중에 변태성욕자가 많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일상에 도사린 범죄와 말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들, 그리고 이를 은폐하는 권력과 자본의 결탁을 폭로했다. 명단을 확인해 달라는 부탁에 단호하게 거절하던 내부 고발자는 결국 기자를 불러 세운다. “자네는 그동안 어디 있었지? 왜 이리 오래 걸렸나.”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생존자라고 부른다. 만약 기사가 좀 더 일찍 나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건과 사건을 엮고 사건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진실의 실체에 접근하는 과정은 언론의 사명과 저널리즘의 본질을 다시 고민하게 한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감시하고 부정과 부패를 폭로하는 데 있고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다. 현상의 외피를 건드리며 값싼 트래픽에 안주하는 이 땅의 기자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뉴스의 혁신은 여전히 콘텐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무거운 교훈을 남기는 영화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오늘 아침 주주총회를 끝으로 미디어오늘에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ChatGPT와 저널리즘의 책임”을 주제로 특강이 있는데 이게 제가 미디어오늘 대표로 나서는 마지막 대외 행사가 되겠네요. 끝나고 선배들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요. 1. 4월부터 슬로우뉴스 대표를 맡기로 했습니다. 유한회사 슬로우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제가 100%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뽑고 콘텐츠도...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시간 날 때마다 만들었던 라즈베리파이 오디오. 드디어 완성. 사실 별 거 없는데 여기저기서 부품 조달하고 거기에 맞춰 도면 만드는 게 힘들었습니다. build log는 영어로. This is my new network audio system. All in one Integrated Amplifier. 1. Raspberry Pi 4B. 2. Hifiberry DAC+DSP. 3. 7 inch touch screen for raspberry pi. 4. Chromecast...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에 경력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으로 3년, 사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다행히 월급날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요. 열심히 벌어서 금융 부채를 모두 정리했고 만성적인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언론사 경영이라는 게 날마다 전쟁 같았지만 한 번도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가능한 미디어오늘을 위한 성장 엔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 15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지면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아쉬움이...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