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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9, 2004

흥미롭고 놀라운 영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상영되지 않았고 당분간 상영할 계획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당신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읽어도 무방하다. 아마도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시간 순서가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 줄거리를 다시 정리해 본다. 천천히 제대로 읽어야 이해가 된다.

1. 기차 여행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엘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라는 그 흔한 노래를 모른다. 어색함을 풀어보려던 클레멘타인은 벌쭘해진다.

2.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친해진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클레멘타인이 칫솔을 가지러 집에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엘에게 웬 남자가 다가온다. 그는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괜찮느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로 옮겨간다. 물론 관객은 과거로 옮겨가는 걸 모른다. 여기서부터 혼란스러움이 가중된다.)

3. 조엘은 발렌타인 데이 선물을 들고 클레멘타인을 찾아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다. 더 놀랍게도 클레멘타인에게는 다른 남자친구까지 있다.

4. 그리고 조엘은 몇일 뒤 알게 된다.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는데 클레멘타인은 거기에 의뢰해서 조엘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 클레멘타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5. 한참을 괴로워하던 조엘은 그 회사를 찾아가서 역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억을 지우는 작업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현재와 과거가 교묘하게 뒤섞인다. 물론 그의 의식 속의 현재와 과거다.)

6. 아마도 꿈에서 조엘은 기억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여기에 저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엘은 잠들어 있고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의 눈으로 존 말코비치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조엘은 의식 속에서 그의 기억을 헤맨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꿈꿀 수, 또는 의식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억은 빠른 속도로 삭제되고 있는 중이다.)

7.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클레멘타인은 이내 사라진다. 그의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다.

(눈치 빠른 관객들은 여기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만나는 장면이 처음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관객들은 그 차이를 기억하지만 다만 조엘은 모른다.)

8.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엘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클레멘타인을 깨끗이 잊었다.

(영화는 여기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또 한번 혼란스럽다.)

9.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클레멘타인은 배달된 편지봉투 속에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하고 튼다. 거기에는 왜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가 클레멘타인의 고백이 녹음돼 있다.

(만난지 이틀 밖에 안됐는데 테이프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조엘이 싫다고 한다.)

10. 조엘도 조엘의 집에서 테이프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역시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이유가 녹음돼 있다. 조엘도 마찬가지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싫어졌다고 말한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연인들은 혼란에 빠진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은 오래 사귀다가 서로에게 지친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조엘도 역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우연히 기차 여행에서 서로를 만나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다시 서로에게 끌린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두번 처음 만난다. 눈치챘겠지만 조엘이 클레멘타인 노래를 몰랐던 건 그 기억이 지워졌기 때문이고 클레멘타인의 집 앞에서 놀라던 남자는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클레멘타인을 가로챈 남자다. 전혀 몰라야 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조엘이 사라지는 기억들에 저항하고 그 어느 구석에 클레멘타인을 몰래 숨겼기 때문이다. 클레멘타인은 막연하게나마 이를테면 그리움의 형태로 조엘의 기억 가운데 남게 된다. 그건 클레멘타인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끌린다. 마치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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