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민족주의가 만든 정신분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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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본에 대한 공포 심리와 사이비 민족주의가 맞물려 일종의 정신분열증으로 치닫고 있다. 외국 자본의 국부 유출을 침소봉대하면서 재벌 대기업은 난데없이 민족자본으로 둔갑했다. 이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재벌 개혁을 앞장서서 외쳐왔던 김기원 방송대학교 교수가 신랄한 비판을 잔뜩 쏟아냈다. 10월 25일 국회 정무위원회 공정거래법 개정안 공청회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김 교수는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2001년 개혁이 후퇴하기 이전의 원래 위치를 회복하는 수준도 안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재벌 대기업은 규제를 더 완화해달라고 아우성이다. 11월 국회 상정을 앞두고 있는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재벌 개혁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핵심 쟁점은 먼저 외국 자본의 경영권 위협 가능성이다. 김 교수는 SK주식회사의 경우가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주장한다. SK는 SK텔레콤 등 알짜배기 출자자산을 갖고 있었고 이 출자자산의 가치가 회사의 주식 가치보다 큰 경우였다. 당장 출자자산을 처분하기만 해도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구조였다는 이야기다. 이걸 이른바 출자자 할인이라고 부른다. 우량 자산이 많은 삼성물산의 경우도 여기 해당된다.

그러나 다른 회사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경우는 출자자산의 가치보다 회사의 가치가 더 높다. 힘들게 경영권을 장악해도 단기적으로 이익을 챙길 전망이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삼성전자의 주요 외국인 주주들은 캐피탈그룹이나 도이치에셋, 싱가폴 투자청 등 투자펀드들이다. 굳이 경영권을 장악할 이유도 없고 장악하더라도 경영할 능력도 없다.

또 삼성전자는 이사회에 시차임기제를 적용, 해마다 이사의 3분의 1만 교체되도록 하고 있다.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 교체를 시도하더라도 3분의 1 이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임기 만료가 안된 이사를 해임하려면 특별결의 요건에 따라 3분의 2 이상 의결권을 확보해야 한다. 외국인 주주의 지분 비율이 60%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이만큼 의결권을 끌어모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의 경영권 위협이 터무니 없는 엄살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의 논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상무는 확률은 낮아도 가능성은 있다는 논리를 편다.

“우리가 해마다 엄청난 국방비로 지출하는 것은 전쟁이 터질 확률이 높아서가 아니다.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한번 전쟁이 터지면 그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확률도 마찬가지다.”

경영 간섭의 우려도 들고 나온다. 외국인 주주들의 경영 간섭이 심화되면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늘어나고 경영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상무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따라 삼성전자의 의결권이 15%로 제한된다면 외국 자본의 인수합병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상무는 “이렇게 강하게 반대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급박하고 너무나 큰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정당한 경영간섭은 얼마든지 바람직하고 외국인 주주뿐만 아니라 모든 주주들에게 허용돼야 한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재벌 총수에게 확고부동한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필요할 때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다. 민감한 문제지만 지난해 SK의 경우 분식회계와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경영진의 책임을 묻거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주주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라고 볼 수 있다.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크게 세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번째는 출자총액 제한제도의 개편. 순환출자와 가공자본을 제한하는 이 제도는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순환출자는 이를 테면 첫번째 회사가 두번째 회사에 투자하고 두번째 회사가 세번째 회사에 투자하고 세번째 회사가 다시 첫번째 회사에 투자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가공의 자본이 만들어지고 재벌 총수의 지배력이 강화된다. 지금까지는 자산 규모 5조원 이상의 재벌 대기업의 경우 다른 회사 주식을 순자산의 25%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해 왔는데 이번 개정안에서는 제외 또는 예외 대상이 늘어나고 졸업기준을 두고 있다.

두번째는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계열사의 지분을 모두 합쳐 15%가 넘을 경우 15%를 넘어서는만큼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경우,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보험 등 금융 계열사들 주식의 의결권이 제한된다. 올해 4월 1일 기준,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삼성전자 지분은 모두 합쳐 23.4%. 이 가운데 자사주 6.8%를 뺀 지분은 17.8%, 개정안에 따르면 여기서 15%가 넘는 2.8%만큼 의결권이 줄어들게 된다.

세번째는 금융거래 정보요구권의 재도입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하는 권한을 주자는 이야기다. 계좌추적권이라고도 한다. 검찰 조사에 앞서 혐의만으로 조사를 할 수 있고 혐의가 드러나면 검찰에 제소할 수 있다.

쟁점 1.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투자를 가로막는가.

먼저 출자총액 제한제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과연 이 제도가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있느냐는데 있다.

안재욱 경희대학교 교수는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안 교수는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기업들의 능동적인 경쟁을 가로막고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 출자가 생산적인 투자로 이어지는 측면을 공정위가 간과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안 교수는 이 제도가 당장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SK텔레콤 등은 모두 계열사들 출자로 큰 기업들이다. 계열사 출자는 기업이 산업 및 시장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미래의 새로운 수익사업을 찾아 나가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다. 출자총액 제한제도 미래 신성장 동력의 출현을 제한할 수 있다.”

이에 맞서는 김기원 교수의 반박은 단호하다. 김 교수는 출자총액 제한제도와 투자 부진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예외규정이 있는데다 굳이 투자를 하려면 계열사 출자가 아니라도 채무나 주식발행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제한에 걸려서 투자를 못한다면 신규 사업을 사업부 형태로 추진하거나 기존 회사를 합병하는 방법도 있다. 출자총액 제한제도 때문에 투자를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가 보기에 출자총액 제한제도는 재벌의 자본 뻥튀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4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18개 기업집단은 순자산의 10.4%를 출자하고 있다. 한도 25% 기준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14.6%, 22조6천억원 가량 추가 출자여력이 존재하는 셈이다. 출자총액 제한제도 때문에 투자를 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말이 안된다.

쟁점 2.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이 경영권 위기를 불러오나.

더 뜨거운 쟁점은 역시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이다. 특히 이 부분은 삼성그룹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경우 당장 2.8%의 의결권이 줄어들게 된다. 10월 27일 주가 43만원을 기준으로 1조7735억원 규모다. 이 정도면 펄쩍 뛸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 7.2%를 확보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삼성물산을 4.8%, 호텔신라를 7.3%, 삼성중공업을 3.9% 등등 여러 계열사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생명이 확보하고 있는 계열사 주식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7조1202억원 규모에 이른다. 지난해 이 회사 당기순이익 3312억원의 21배가 넘어선다.

이밖에도 계열사들과 거래한 채권과 채무가 각각 4347억원과 1284억원에 이른다. 또 삼성카드가 떠넘긴 회사채를 사들이거나 삼성중공업으로부터 유형자산을 사들이는 등 삼성생명은 사실상 그룹의 금고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이들 특수관계자들과 거래에서 얻은 이익이 1016억원에 지나지 않은 반면 비용이 2345억원에 이른다는 사실도 이 복잡한 거래의 실체를 설명해준다.
김기원 교수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경영권 위기가 아니라 지배권에 있다고 본다. 의결권이 전면 제한되더라도 경영권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주식을 우호적인 기관투자자 등에게 잠깐 넘겼다가 주주총회가 끝나고 되살 수도 있다. 또 지금처럼 자사주를 꾸준히 사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동안 삼성생명은 보험 계약자들의 보험료를 끌어들여 투자라는 명목으로 계열사들의 경영권을 방어하고 동시에 지배권을 강화해 왔다. 공정위는 이런 악순환을 끊겠다고 나섰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재벌 대기업들은 경영권 위기를 핑계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 교수는 이번 개정안이 실효를 거두려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가 반드시 선결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의 경고는 자못 살벌하다.

“외국 자본을 핑계로 낡은 재벌체제를 존속시키려는 것은 재벌 기업을 망치고 나라경제를 망치는 사이비 민족주의다. 마약 중독자가 황홀한 환각상태를 벗어나기 싫어하는 것처럼 재벌 총수들과 그 가신들은 가공자본에 의한 지배력과 황제경영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끌려가면 기업과 나라 경제는 물론이고 총수 자신도 다같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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