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3, 2004

이 그림, 어딘가 수상하다. 일단 옛날 그림치고는 꽤나 직설적이고 선정적이다. 이 여자애 표정을 봐라. 슬쩍 뒤돌아보는 그런 무심한 눈빛이 아니다. 진주 귀걸이도 수상하다. 예쁘긴 하지만 많아봐야 17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딱 봐도 별로 부유해 보이지 않는 여자애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예쁜 귀걸이다.

1632년 네덜란드 태생의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이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꼽힌다.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냈던 베르메르는 평생 36점의 그림밖에 안그렸고 43살에 일찍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이 여자애가 누구인가, 베르메르와는 어떤 사이인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딸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다. 그렇다고 연인을 바라보는 열정적인 눈빛도 아니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여기서 출발한다.

왜 이 여자애는 내가 가장 아끼는 귀걸이를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영화에서 베르메르의 부인은 이 그림을 보고 “음란하다”면서 울부짖는다.

그림을 그리면서 집안에 수상한 공기가 감돈다. 이 여자애, 그리트는 베르메르 집의 하녀다. 베르메르는 잡아먹을 것처럼 그리트를 노려보지만 더 다가서지는 않는다. 돈을 벌려면 그림을 그려야 하고 장모와 부인는 그림을 재촉하면서도 두 사람의 사이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결국 모두가 눈치를 챈다.

그리트는 아마도 베르메르를 사랑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베르메르 대신에 시장 푸주간에서 일하는 남자애를 만난다. 베르메르 역시 그리트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드러내지 못한다. 베르메르와 그리트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은 그림 밖에 없다. 그리트는 눈빛에 감정을 담아내고 베르메르는 그걸 그대로 그림에 옮겨담는다. 언뜻 평화로운 그림이지만 폭풍같은 열정이 숨어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음란’한 그림일 수도 있다.

그리트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은 그림의 여자애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인다. 예쁘긴 하지만 눈빛은 공허하고 그리트가 보여주는 밝은 미소도 없다. 대체로 유쾌하지만 그리트는 언뜻 무력하고 수동적인 것처럼 비춰진다. 그림 하나가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영화 ‘죽는 자를 위한 기도’.

영화 ‘죽는 자를 위한 기도’.

10년도 훨씬 전에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영화다. 기억을 더듬어 한참을 찾았는데 DVD 따위는 아예 없고 어렵사리 토런트에서 내려 받아 영어 자막으로 다시 봤다. 미키 루크가 권투에 다시 빠져들기 전, 살인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무렵의 영화다. 마틴은 아일랜드 해방군의 테러리스트다. 경찰에 쫓기다가 원치 않은 살인 청부를 떠맡은 마틴은 살인 현장을 한 신부에게 들키고 만다. 그는 신부에게 총을 겨눴다가 그냥 돌려 보낸다. 그 뒤 마틴은 성당으로 숨어들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브뤼노 다베르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2년 반이 흘렀다. 어느날 온 가족이 모여 TV를 보는데 아들이 말한다. "우리 아빠도 저런데서 일해야 되는데." 브뤼노는 중얼거린다. 저 친구가 내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군. 그날 저녁 브뤼노는 위험한 계획을 떠올린다. 내 경쟁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는지 알아야겠어. 브뤼노는 다음날 잡지에 가짜 구인 광고를 낸다. 사서함에 경쟁자들의 이력서가 가득 쌓인다. 브뤼노는...

영화 ‘디바’.

영화 ‘디바’.

장 자끄 베넥스의 1981년 영화로 이른바 누벨 이마쥬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이미지만 강조한 현실 도피적인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또 얼마나 되나. 나는 이 영화를 10번쯤 봤다. 여기 두 개의 테이프가 있다. 하나는 소프라노 신시아 호킨스의 공연 실황을 몰래 녹음한 테이프고 다른 하나는 인신매매 조직에 개입한 장 사포르타 경감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용의 테이프다. 영화가 시작되면 알프레도 카탈리니의 오페라 '라 왈리' 가운데 '나는 멀리 떠나야...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