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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를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24, 2004

세계적으로 날마다 5살 미만 어린이 3만4천명이 굶어서 죽습니다. 한해에 무려 1200만명입니다. 굶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굶주림은 불가능한 선택이 주는 고통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슬픔이고 굴욕이고 공포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굶는 것일까요. ‘굶주리는 세계’는 이들이 굶는 것이 이들의 인구가 많아서도 아니고 식량이 부족해서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추상적이고 공허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무력한 것은 그 대안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패배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굶주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세계의 굶주림을 종식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아래 열두가지 신화 말이죠. 좀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론을 괄호 안에 적었습니다.

첫번째 신화 : 식량이 충분치 않다.

식량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세계 모든 사람이 비만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곡물이 생산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도는 2억명이 굶고 있는데도 1995년 기준으로 밀과 쌀을 각각 6억2500만달러와 13억달러어치나 수출했다.

미국에서도 어린이의 8.5%가 굶는다. 누가 이들에게 식량이 부족해서 굶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의 해외원조 곡물은 1995년 기준으로 3백만톤에 이른다. 굶는 아이들에게 한해 빵 600개를 줄 수 있는 양이다. 해외원조할 곡물은 있지만 정작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줄 빵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곡물은 넘쳐난다. 그러나 곡물만 따지면 그렇지만 육류 소비를 감안하지 않는 계산이다. 소고기 1킬로그램을 만들려면 곡물 7킬로그램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는 4킬로그램, 닭고기는 2킬로그램이 필요하다. 육류 소비를 줄이지 않는 이상 식량이 넘쳐난다는 주장은 사실 말이 안된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더 잘 먹기 위해 못 사는 나라 사람들의 굶주림은 방치될 수밖에 없다. 창고에 쌓아두고 풀지 않는 곡물도 있지만 충분히 큰 규모는 아니다. 식량은 확실히 부족하다.)

두번째 신화 : 자연 탓이다

흔히 가뭄이나 홍수 때문에 사람들이 굶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같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자연재해에 취약한 식량 환경 때문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가뭄이나 홍수가 들면 땅과 가축을 헐값에 내다판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가난으로 빠져든다. 그 다음해 부터는 풍년이 들어도 가난이 계속된다. 세계적으로 농업은 자본에 종속되고 농민들은 그들의 생산 기반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굶주림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해다. 아무리 많은 식량이 생산돼도 그들은 여전히 굶는다.

(가난한 나라의 굶주림이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논리는 구체적이지 못하다. 결국 자유시장과 자본의 탐욕이 문제다. 그걸 어쩌란 말인가. 주장은 공허하고 대안은 모호하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려는가.)

세번째 신화 : 인구가 너무 많다.

인구 폭발은 끝났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세계적으로 여성 한명당 자녀수는 1950년 5명에서 1970년대 후반 4명으로 1990년대 중반, 2.8명으로 떨어졌다. 안정적으로 인구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은 2.1명 정도다. 세계 인구는 115억 정도에서 안정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굶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흔히 착각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굶는 것일뿐 인구가 많아서 굶는 것은 아니다. 인구가 많아도 굶지 않는 나라가 있고 인구가 적어도 굶는 나라가 있다. 인구밀도와 굶주림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물론 높은 인구 증가율은 굶주림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인구 증가율이 굶주림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인구 증가율이 가져온 빈곤이 원인이다. 그리고 인구 증가율은 분명히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굶주림은 더욱 늘어만 간다.

(인구가 많은 것과 그들의 굶주림이 관계가 없다는 건 그야말로 말장난이다. 분명히 감당할 수 없을만큼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나라가 있고 흔히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릴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나마나 한 말이다.)

네번째 신화 : 식량이냐 환경이냐.

더 많은 식량을 만들어 내려고 더 많은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굶어가는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환경은 더 많이 파괴되고 굶는 사람도 더 늘어난다. 굶어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환경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된다.

(모호하다. 무슨 말을 하는가 정리가 안될 정도다. 식량이냐 환경이냐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게 아니라 둘다 선택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환경과 무관하게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여전히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

다섯번째 신화 :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농약을 뿌려도 벼멸구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내성이 생길 뿐만 아니라 벼멸구의 천적까지 죽여서 자연적인 개체수 조절이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농민들은 계속 농약을 써야 한다.

녹색혁명으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식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도 굶는 사람이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는데 있다. 녹색혁명이 소수의 부농과 절대 다수의 빈농을 나누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단순히 식량 생산의 증가 뿐만 아니라 농업의 산업화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엉뚱한 비유를 들고 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그 안의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을 끄러 들어간다. 몇사람은 구하겠지만 집은 여전히 불타고 있는게 아니냐는 이야기다. 첫번째 신화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식량이 부족해서 굶는 게 아니고 다만 제대로 분배가 되고 있지 않을뿐, 그래서 녹색혁명이 굶주림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좋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냐. 생태농업? 대안농업?)

여섯번째 신화 : 정의냐 생산이냐.

효율성은 환상이다. 소농이 오히려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더 높다. 토지를 균등하게 나눠주면 부농의 생산성이 줄어들어 굶주림이 확산될 거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정의와 생산은 상호보완적이다.

(소농의 생산성이 높다는 주장을 나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자본의 효율성은 생산의 효율성이 아니라 유통의 효율성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유통의 효율성은 설령 생산성은 떨어지더라도 대량 생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닌가. 토지 개혁은 하나의 가능성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일곱번째 신화 :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여덟번째 신화 :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둘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자본은 흔히 굶주리는 사람들보다 더 비싼 가격에 외국에 내다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어이없게도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식량 수출은 늘어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경쟁에 내몰린 농민들은 결국 하나둘씩 쓰러진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은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가 이익을 얻는 구조다.

(당연한 이야기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해답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 다음은 뭔가. 왜 시장을 넘어설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가.)

아홉번째 신화 :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수동적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굶어서 죽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반 세계화, 반 자본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시위만으로 세계화에 맞설 수 있는가.)

열번째 신화 :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미국의 해외 원조는 국내총생산의 0.15%밖에 안된다. 미국의 해외원조는 독일의 절반, 네델란드의 5분의 1에도 못미친다. 미국이 세계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환상이다. 미국의 해외원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3분의 1이 집중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0개 나라는 5%도 못받는다. 해외원조의 목표는 굶주림 해결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흔히 쓰인다.

미국의 해외원조는 식량의 수급구조를 바꾸는 역할도 한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난 다음 세계 3위의 미국 농산물 수입국이 됐다. 일시적으로 굶주림을 줄이지만 장기적으로 농업을 무너뜨린다. 한편으로는 진실을 흐리게 하고 대중을 호도하는 역할도 한다.

열한번째 신화 :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못사는 나라 사람들을 경쟁자로 생각한다. 열대 어느 나라의 누군가가 저임금으로 고생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바나나를 싸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해법은 굶주림을 만드는 세계 경제의 시스템이 굶주리는 사람들이나 우리에게 모두 옳지 않다는데서 출발한다. 굶주림의 비용은 결국 누군가가 나눠서 치러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폭력을 방치할 때 결국 다음 희생자는 당신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시스템을 바꾼다고 잘사는 나라의 사람들, 이를테면 당신이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정당한 이기심과 동정은 동일하다. 연민으로 흐르는 걸 경계해야겠지만 동정은 필수다.

(그들이 가난을 벗어나는게 우리에게도 이롭다는 논리다. 경제적 이득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이득이라고 보는게 맞겠다. 번역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니라 동정이나 연대의식이다. 그들의 굶주림을 만드는 폭력이 내가 맞서 싸우는 폭력과 동일하다는게 핵심이다.)

열두번째 신화 : 식량이냐 자유냐.

사람들은 흔히 급진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변화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할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굶주림을 벗어나야 자유도 가능하고 그래야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자유도 확대된다. 오히려 자유의 정의를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그래서 급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긴가.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제한해야 한다는데까지만 나갔을뿐 변화의 확신은 여전히 없다. 여전히 반 세계화와 반 자본의 원론에 그치고 있다. 연대의식과 도덕적 용기가 유일한 해법이지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참고 : 여러분, 무엇을 먹고 있습니까. (이정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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