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스내처’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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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마는 그 사람이 자기 삼촌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 삼촌과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모든 것이 똑같은데 단지 그 사람이 삼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는 거야. 마일즈, 정말이지 나는 두려워.”

사람들이 하나 둘씩 달라진다는 이 이야기는 꽤나 오래되고 제법 익숙한 이야기다. 수많은 변주가 나왔고 영화로도 여러차례 만들어졌다. 이 이야기의 원본이 거의 50년만에 마침내 번역돼 출간됐다.

마일즈 베넬은 스물여덟살의 의사다. 캘리포니아주 밀 밸리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윌마의 삼촌 사건 이후로 이 마을에 이상한 일이 잇따라 나타난다. 병원에 찾아온 40대 여자는 자기 남편이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온 아홉살 남자 아이는 자기 엄마만 보면 경기를 일으킨다고 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지금 할머니랑 살고 있다. 똑똑한 젊은 변호사까지도 결혼한 자기 누나가 진짜 누나가 아니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윌마처럼 이야기한다. 윌마의 삼촌은 진짜 삼촌과 똑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몸에 난 작은 상처까지 그대로고 과거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윌마에 따르면 과거를 이야기할 때 삼촌의 눈빛은 분명히 다르다. ‘그 남자’는 과거의 기억을 암송하듯 말하고 있을뿐 그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윌마는 그게 거짓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가짜 남편과 가짜 엄마와 가짜 누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들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마일즈의 친구, 잭의 집 지하실에서 이상한 시체가 발견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체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생명력을 느낄 수 없는 이를테면 얼굴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인도 불명확했다. 심지어 손가락에는 지문조차도 없었다. 마일즈는 이 시체가 죽은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죽은 적이 없다는 건 한번도 살아있던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그것’은 사람의 시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날 밤 잭으로 변한다. 잭은 용케 도망쳐 나왔지만 그대로 잠이 들었다면 아마 ‘그것’이 잭의 몸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갈수록 늘어났다. 마일즈의 여자친구 베키의 집 지하실에서도 베키를 닮은 ‘그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베키를 닮아가고 있었다.

깨어난 베키는 울면서 말한다. “어제 아침 이후로 나는 줄곧 이렇게 느끼고 있었어. 우리 아빠는 진짜 아빠가 아니라고.”

마일즈의 집 지하에서는 커다란 누에고치 같은 것이 여러개 발견됐다. ‘그것’들은 외계에서 날아온 생명체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생명체의 몸을 빌려 사는 기생 생물이었다. 버섯의 포자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든 그것들은 생명체를 복제하고 그 생명체에 파고들어 육체를 지배했다. 사람으로 변신한 그것들은 누에고치를 다른 사람들의 지하실에 숨겨놓았고 빠른 속도로 마을을 휩쓸었다.

마일즈는 비로소 마을의 변화를 눈치챈다. 마을은 오래전부터 죽어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그들의 삶을 가꾸지 않는다. 식당은 텅 비어있고 어디에나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거리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하나같이 얼굴에 표정이 없다. 이제는 사람과 ‘그것’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잠이 들면 언제 그것들이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올지 모른다.

그것들은 말한다. “마일즈, 그리 나쁘지 않아. 그건 평화롭고 조용해. 음식은 여전히 맛잇고 책을 읽어도 재미있고….”

그것들은 마일즈에게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것들에게는 감정이 없고 당연히 아무런 희망도 없다. 긴장도 없고 고민도 없다. 기묘한 형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네는 왜 사나. 왜 먹고 자고 섹스를 하고 자손을 만드는가.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야 말로 자네의 기능이지. 존재 이유기 때문이야. 생명은 그밖에 아무 이유가 없고 다른 이유도 전혀 필요하지 않아.”

어쩌면 미국 대륙에 진출한 사람들이 버팔로를 몰아낸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미국 대륙을 뒤덮었던 버팔로 떼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은 버팔로를 증오하지 않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버팔로를 몰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한다.

“생명의 기능이란 가능한 한 살아남는 것이고. 그 어떤 동기도 이 기능을 간섭할 수 없어. 악의가 관련된 것도 아니라네. 우리가 존속해야 하는 건 존속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걸 이해 못하겠나.”

1956년에 발간된 이 책은 당시 매카시즘 열풍과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례가 없는 극단적인 반공 사상으로 학문과 표현, 정치활동의 자유는 철저하게 봉쇄됐다. 사상 검증으로 1만여명의 미국인들이 직장을 잃기도 했다. <바디 스내처>의 마일즈처럼 당시 미국 사회는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렸다.

매카시즘은 기묘하게 굴절된 집단 편집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외계에서 온 기생 생물처럼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타협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고 오히려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면 극단적인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00년대의 ‘바디 스내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다. 자본은 국경과 규제를 넘고 더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세계의 빈곤은 더욱 확산된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 없는 산업과 경쟁력이 없는 나라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는 그렇게 착취와 종속이 확산되는 과정이다. 이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자본의 자유를 확산시킨다.

분명한 것은 있다. 자본의 무한 증식이야 말로 자본의 존재 이유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결국 자본의 생존을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대세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다. 아무도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우리는 맑게 깨어서 이 외계 기생 생물과 맞서 싸우고 몰아내야 한다. 그것은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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