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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21, 2003

‘장화, 홍련’은 무섭다기 보다는 예쁜 영화였다. 열다섯살 무렵 여자아이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눈이 아플만큼 선명한 붉은 빛깔로 기억에 남았다. 어딘가 쓸쓸하고 처연한 빛깔이었다.

수미와 수연은 계모가 싫다. 아빠가 젊은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이면서 행복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엄마는 결국 옷장에서 목을 매 죽었다. 엄마가 죽고 난 뒤, 젊은 여자는 계모가 됐다. 엄마는 계모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계모도 수미와 수연을 미워한다. 계모는 수미 몰래 만만한 수연을 괴롭힌다. 때리기도 한다. 계모와 수미와 수연은 날마다 무서운 꿈에 시달린다. 계모는 소리를 지른다. “정말 무서운게 뭔지 알아? 그건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야.”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앞으로 볼 생각이라면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생리대를 훔쳐 나오다 들킨 수미에게 계모는 묻는다. “어머, 너도 생리하니?” 수미는 차갑게 대답한다. “나 말고 수연이.” 그러나 사실 생리는 수연이 아니라 수미가 한다. 그만큼 수미는 수연을 가깝게 느낀다. 그러나 계모와 수미는 모르고 있다. 수연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 남아있는 건 수연의 기억 뿐인데, 그런데도 기억은 현실을 짓누르고 가끔 심각하게 뒤틀어 놓는다.

수연은 죽어서도 늘 계모와 수미의 곁을 맴돈다. 수연은 아마도 두사람의 죄의식이 빚어낸 망상일 것이다. 어느날 계모는 아빠가 밖에 나간 사이 수연을 죽인다. 집안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든다. 뒤늦게 돌아온 아빠는 수미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지른다. “수미야, 정신차려. 수연이는 오래 전에 죽었잖아. 수연이는 이 세상에 없어.” 이상한 일이다. 수연이는 어디로 간 걸까. 그럼 계모가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 프로이트.

억압(repression) : 의식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고 충격적이어서 무의식속으로 억눌러 버리는 것.억압은 다른 방어기제나 신경증적 증상의 기초가 된다. 반면 의식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눌러 버리는 것은 억제(suppression).

투사(project) : 자신의 심리적 속성이 타인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기가 화가 나 있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화를 냈다고 생각하는 것.

합리화(rationalization) : 현실에 더 이상 실망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럴 듯한 구실을 붙이는 것. 먹고는 싶으나 먹을 수 없는 포도를 보면서 ‘신포도는 안 먹겠다’고 말하는 경우.

반동형성(reation formation) : 미운놈에게 떡 하나 더준다. 무의식적 충동과 정반대의 것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 실제로 자기를 학대하는 대상인데도 그 대상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

부정(denial) : 고통스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배신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

승화(sublimation) :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태와 방법을 통해 충동과 갈등을 발산하는 것. 정육점 주인이나 외과의사로서의 직업선택에는 공격적 충동이 승화가 작용할 수도 있다.

퇴행(regression) : 초기의 발달단계나 행동양식으로 후퇴하는 것.동생을 본 아동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응석을 부리는 것.

전위(displacement) : 욕구충족 대상에 접근할 수 없을 때 다른 대상에게 에너지를 돌리는 것. 교수에게 꾸중을 들은 학생이 대신 동료에게 화를 낸다.

그렇다면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자. 계모는 쓰러진 옷장에 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수연을 보고 놀라 도망쳐 나온다. 그러다가 뒤돌아 서는 순간, 수미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다. “당신 방은 아래층이잖아. 여기 올라오지 마.”

계모는 망설인다. “넌 언젠가 네가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거야.” 수미는 망설이지 않고 답한다. “후회 안해.” 두사람의 눈빛이 부딪힌다. 계모는 싸늘하게 돌아 나오고 그렇게 수연은 죽어갔다. 수미는 계모가 수연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계모는 수미도 수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계모와 수미는 수연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연은 이미 죽었지만 두 사람의 기억에 남아 끊임없이 다시 죽는다.

계모와 수미, 두사람은 끊임없이 수연을 다시 죽이고 괴로워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슬프면서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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